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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이 모양인데 정치인들은 왜 매일 싸움질만 하는지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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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성낼 기력도 없는지 그냥 다 포기한 얼굴이더라.”

이번 설 연휴기간 지역구를 찾아간 여야 의원 6명이 전하는 민심의 현장이다. 여당 의원들은 “잘하라고 뽑아줬더니 1년 동안 한 게 뭐 있느냐”, 야당 의원들은 “싸움박질 말고는 뉴스거리 만들 게 없느냐”는 질책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2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성난 민심을 달래야 하는 정치권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정치부문



의원들이 전하는 설 민심

서울 중구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
“책임이 따르니 … 여당하기가 힘든 거야”

 이래저래 편치 않은 설 연휴인데 날씨마저 돕지 않는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시장을 돌며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만 너무 차가운 내 손이 민망할 지경이다. 그래도 반갑게 잡아주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들이 내게 용기를 준다.

우리 지역엔 유난히 재래시장이 많다.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뿐만 아니라 지역민이 다니는 작은 재래시장도 제법 많다. 이틀간 다녔지만 10분의 1이라도 인사했을까. 새벽시장의 생선좌판 아주머니는 오랜만이라고 ‘투정’하면서도 작은 소리로 내 귀에 속삭인다. “바쁜지 다 알아. 얼마나 힘들겠어.” 중앙시장의 야채가게 아저씨는 서민의 눈이 번쩍 뜨이게 좀 해 달라고 애원한다. 약수시장 할머니도 얘기하신다. “먹고살 게 없어.” 경제가 얼어붙을수록 서민의 피해가 제일 크다는 경제원론을 들으면서 내 마음도 걱정으로 단단히 얼어간다.

제발 싸움 좀 하지 말라는 야단도, 밀어붙이라는 권유도 들었지만 홍합을 무딘 칼로 다듬던 할머니의 말씀이 나를 추스르게 한다. “여당 하니 힘들지. 책임이 따르니…. 야당이 편한 거야.” 그래, 국정 책임은 여당에 있는 거다. 야당이 생떼를 쓰든 합리적 비판을 하든 국민의 마음을 못 얻으면 그 허물은 온전히 여당 몫이다. 어떻게든 야당을 품고 난국을 풀어갈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닭발집 아주머니가 사진을 찍자고 한다. “아이고, 모자는 벗어야지” 하는 아주머니와 팔짱을 끼며 나는 활짝 웃는다. 새해 함께 희망을 찾을 각오로.



대전 중구 자유선진당 권선택 의원
“정권의 충청 홀대가 어제오늘 일이냐”

 연휴 사흘 동안 대전역과 상점가·경로당과 각종 모임을 돌아다녔다. 다들 근심과 피로가 가득했다. 택시에 오르자 운전기사는 대뜸 “1년 전에 비해 손님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고 투덜댄다. “새해엔 나아지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하자 “대통령과 한나라당 하는 걸로 봐선 어림도 없다” 고 쏘아붙인다. 지난 추석 민심의 키워드가 실망과 분노였다면, 설 민심은 자포자기에 가까웠다. 한 단골 식당 주인은 “경제 하나 보고 찍었더니… 이젠 기대두 안 혀. TV에나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라며 한숨 쉬었다. 용산 사태를 두고는 “정부의 조급증 탓에 터진 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의 거취에 대해선 “정부가 왔다 갔다 고민할 것 없다”며 “(신속히 경질하고) 경제 살릴 생각이나 하라”는 지적이 나왔다. 장·차관 인사에 대해선 “정권의 충청권 홀대가 어제오늘 일이냐”며 “관심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지역구민들은 대부분 “민주당이 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FTA가 조속히 통과돼야 나라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들은 정부의 수도권 규제완화 조치에도 강한 불만을 터뜨리며 “그렇게 되면 지역 경제 회생은 물 건너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자유선진당에 대해서도 비판을 잊지 않았다. “행복도시, 과학 비즈니스 벨트 건설 등 당이 공약한 대형 사업들이 답보 상태”라며 “말로만 외치지 말고 성과를 보여 달라”고 지적했다.



해남-완도-진도 민주당 김영록 의원
“여당과 싸우더라도 막을 건 막아야제”

 “경기가 이렇게 안 좋은데 설은 무슨…, 올 한 해 살아갈 일이 막막해요.”

설 연휴 사흘 동안 만난 지역구민들은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이런 불경기는 처음”이라고 아우성이었다. 매출이 지난해의 절반으로 떨어진 5일장과 상가는 설 대목에도 손님 찾기가 힘들었다.

농촌 지역도 을씨년스러웠다. 몇 달 가뭄 끝에 저수율이 예년의 25% 선으로 떨어진 곳이 태반이었다. 농민들은 “말라가는 밭작물에 물을 주려 해도 이웃들 눈치가 보인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도로나 통신망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수지 같은 농촌 기간시설도 챙겨줄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장·차관급 인사를 두고 “대통령이 저쪽(영남) 사람만 쓰기로 작심한 것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곧 이어질 1급 이하 공무원 인사도 호남 출신들이 홀대받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용산 참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가 너무 강하게 밀어붙여 사고가 난 것”이라는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왜 정치인들이 싸움질만 하느냐”고 꾸중했다. “소수야당의 한계 때문에 몸으로라도 여당의 횡포를 막을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자 “싸우더라도 막을 건 막아야제”라고 이해해 주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젊은이들은 “몇 년째 취직을 못했다”며 아무거나 일자리를 달라고 내게 부탁해 왔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용인 처인 민주당 우제창 의원
“국회서 치고받는 게 나랑 뭔 상관인가”

 공작기계를 만들던 공장의 넓은 마당엔 오래 전 불을 피웠던 흔적만 남은 채 인기척도 없었다. 인근 식당 주인은 “겨울도 되기 전에 망했다. 기계업체들이 제일 안 좋아…”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설을 앞둔 19~23일 지역구 내에 50여 개 중소기업과 500여 곳의 상점을 찾아다녔다. 우리 지역엔 1300여 개의 중소기업이 있다. 일부 반도체 협력업체들을 빼면 기술 수준이 낮은 단순 소비재와 포장용품 생산업체가 대부분이다.

경제위기의 참상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이미 도산해 문을 닫은 업체가 수두룩했다. 남은 중소기업도 이미 반죽음 상태였다. 한 골판지 포장업체 사장은 “직원 절반을 내보냈다. 진짜 불황은 이제부터라는데 이러다가 여름 지나면 인근에 몇 개나 살아남아 있을지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자영업자들의 형편은 더 심각했다. 용인시내 중심부인 중앙동 상가에도 폐업이 속출했고, 남은 가게들도 개점휴업인 경우가 많아 대낮에도 주인을 만나기 어려웠다. 외곽 읍·면 지역엔 점포 3곳 중 하나가 폐업했다.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들은 이러다 그냥 죽는 거지”라는 한 구멍가게 아저씨의 넋두리 앞에 나는 이미 죄인이었다.

경제난 속에서 입법전쟁을 본 서민들에게 더 이상 국회에 대한 희망 따위는 남지 않았다. “국회에서 치고받는 이유가 나 같은 사람 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지역 상인의 성토가 귓가에 맴돈다. 이미 예고된 입법전쟁 2라운드가 걱정이다.



구미 갑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
“용산 농성자, 불가피한 진압 아니었나”

 9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명절은 물론 거의 매 주말 지역구에서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상인들의 형편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세계 경제위기로 올 한 해가 더 힘들 것이란 전망 탓인지 상인들은 한결같이 “정치가 어떻게 되든 잘 모르겠으니 제발 좀 먹고살게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정치가 오히려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소방서와 경찰서, 시청 상황실도 찾았다. 시민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지만 어두운 표정도 엿보였다. 용산 사건을 두고 불법시위보다 공권력 행사의 적정성이 부각되는 현실 때문인 듯했다. “불가피한 진압 아니었나.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요구하다가, 결과가 이렇다고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면 누가 공권력을 확립하려고 하겠나”란 하소연도 들었다. 이들의 노고에 대해 정당한 사회적 보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경제 위기 속에서도 1조3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한 LG디스플레이 공장도 방문했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일감이 줄어 연휴가 길어질 것이라고 걱정하던 곳이다. 설 연휴 때도 나와 일하는 근로자들의 표정이 밝았다. “선제적·공격적 투자로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겠다”는 이 회사의 경영 마인드가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아닐까. 경제 살리기의 핵심이 곧 일자리란 생각도 들었다. 안타까움과 책임감, 희망을 안고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부산 금정 한나라당 김세연 의원
“세계가 다 어려운데 … 좋은 날도 오겠죠”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민들을 만나뵐 때가 그나마 행복했다.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포부와 약속을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09년 설날을 앞두고는 참담한 심정으로 나섰다.

그래도 “아이고, 설날이라꼬 이래 찾아왔는갑네, 고마배라~”며 반갑게 맞아주시는 어르신들이 예상보다 많아 내심 감사했다. 그래도 역시 송구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는 없었다.

요즘과 같은 때에는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오히려 어색해 “올 한 해 더욱 건강하시라”고 대신한 경우가 더 많았다. “잘 쫌 하소”라고 꾸짖는 분은 점잖은 편이었다. “거(국회) 안에 싸움질들 하는데 몸조심하소”라고 걱정해 주시는 분에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제발 싸우지 마소. 진절머리가 난다. 경제가 이 모양인데 와 그래 싸워샀노” “한나라당이 다수당인데 국민 의견을 잘 들어달라”는 질책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고, 달게 받아들이며 용서를 구했다.

“국회의원들 딱 꼴도 보기도 싫다. 다음부터는 아무도 안 찍을란다. 정치도 못하는 것들이 지XX광들을 하고 자빠졌네”라는 대목에선 아예 말문이 막혔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님이 없는 분식집 사장에게 “이번 경제위기는 오래 갈 것 같습니다. 빨리 극복할 수 있게 더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우짜겠습니꺼. 우리만 그런 기 아이고 온 세계가 다 그런데…. 앞으로 좋아질 날이 안 있겠습니꺼”라며 오히려 위로를 했다. 가슴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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