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연애의 바다'에 푹 빠진 채팅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증세1〉시간날 때마다 PC통신에 접속,/FI나 /A등의 명령어로 특정 이용자의 접속여부를 체크한다.

〈증세2〉그가 찾는 이용자가 접속해 있지 않은 경우 시무룩해지고 괜히 신경질을 낸다.

〈증세3〉상대가 접속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손가락 놀림이 바빠진다.몇시간이고 자판을 두들기며 혼자 웃고 찡그리고 심각해한다.그러나 시종일관 행복한 표정. 이는 채팅(chatting)을 통해 맘에 맞는 이성을 만난 청춘남녀의 초기 사랑병 증세다.

채팅.PC통신을 통한 한담을 뜻하는 이 단어는 청춘 네티즌에겐 하나의 의미를 더 갖는다.바로 컴퓨터 미팅이다.91년 첫 커플 탄생이래 하이텔에서 만나 결혼했거나 결혼을 준비중인 컴퓨터통신 커플은 지난해초까지만도 1백80여쌍.천리안.나우누리.유니텔등을 합하면 이 숫자는 낮잡아도 3~4배 늘어난다.

21세기판 월하노인(月下老人:중국의 전설속에 나오는 중매쟁이)으로 급속 부상중인 PC통신 대화방.'잘되면 술이 석잔,못되면 따귀 석대'라는 옛말이 무색해진 채팅 만화경을 들여다 보자. 심야시간,PC통신 대화방은 항상 만원사례다.'더이상 방을 만들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면 수많은 사이버 커플들의 안타까운 푸념이 터져나온다.그래도 포기는 없다.수시로 다시 도전,성공하면 날밤 하얗게 새우는 일도 즐겁기만 하다. 이들 채팅족이 밝히는'채팅이 미팅보다 좋은'이유-. 1.찾아서 고를 수 있다.대화방 대기실에는 많게는 수백명의 사람들이'초대'를 기다리고 있다.키만 두드리면 뭐하는 사람인지 금세 알 수 있다.

2.시간.장소의 제한이 없다.모니터와 컴퓨터.전화선만 있으면 된다.귀가시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 특히 여성 이용자에게 매력적이다.서울 여자.제주도 남자도 통신상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다.시내전화요금으로. 3.데이트 비용이 싸다.전화비만 들이면 된다.손가락이 좀 고될 뿐이다.

4.사전 대화를 통해 충분히 알고난 뒤 실제 만남을 결정할 수 있다.미팅이나 소개팅처럼 일단 만나고 난 뒤 서로를 탐색해야 하는 고단함이 없다.

5.맘에 안들면 즉시 갈아치울 수 있다.굳이 예의를 갖춰 상대방과 억지로 어색한 시간을 때울 필요가 없다.상대가 정 귀찮게 하면 과감하게 전화선을 뽑으면 그만이다.

물론 채팅이 장점만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은 아니다.우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만큼 상대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조금만 맘에 안들면 상대를 갈아치우다 보니 인스턴트 사랑의'시체'만 즐비하게 놓이게 된다.

전화만큼 빠르지만 목소리보다 느리고,편지처럼 글로 쓰지만 편지보다 감각적이고 즉흥적이다.진지한 감정을 나누기보다'농담따먹기'식 대화가 많고 상대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읽기 어려워 오해도 종종 생긴다.

채팅으로 현재의 배우자를 만났다는 김영삼(28.대학원생)씨는“채팅으로 친해진 여자를 실제로 만났더니 너무 못생겼더라.완전히 ×밟았다”라며 친구들이 겁주는 바람에 첫 만남때 걱정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는다.

김미정(24.여.회사원)씨는 채팅에 대한 아픈 추억의 소유자.괜찮은 남자를 골라 수차례에 걸친 채팅끝에 첫 만남을 가졌다.그러나 스스로'키는 보통이고 남들이 괜찮게 생겼다고 한다'던 상대방 남자의 실물은 기대이하였다.추근거림까지 당해야 했던 김씨는 그후 채팅만 할 뿐 상대와의 실제대면은 절대 삼가게 됐다.

이러한 채팅의 장점만 살리고 단점은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솔직함'이라고 결혼에 성공한 채팅족들은 입을 모은다.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두드리는'솔직함이 실제 만남에서 환멸이나 괴리감을 줄여준다는 것이다.미사여구와 거짓자랑으론 실제 대면 이후를 기약할 수 없다는게 이들의 충고다.아무리'사이버미팅'이라는 최첨단의 방식으로 만났다 해도 남녀간의 만남과 사랑은 결국 전통적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는 것이다.이에대해 21세기판 월하노인도 점잖게 한마디한다.'얼굴 따지고 몸매 가리는 늑대,속이고 거짓말하는 여우,접속금지'. 김현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