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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종가 이야기] 500년 세월 차례상 변했어도 '우리 할아버지'그대로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설을 맞아 ‘민족의 대이동’은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됐습니다. 설 차례는 가족의 뿌리인 조상들에게 올리는 새해 첫 인사입니다. 설을 앞두고 중앙SUNDAY가 ‘명문 종가’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16, 17세기 조선이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궁금해서입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종손·종부로서의 책임감은 여전히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제례를 포함한 뿌리를 지키는 방식은 21세기에 맞게 변하고 있었습니다(사진은 점필재 김종직 종가에서 기일을 맞아 집안 어른이 축문을 쓰는 모습).

“설이나 추석 차례는 생각 이상으로 간소했어요. 종가가 아닌 저희 집 차례상보다 더 소박했을 정도니까요.”
지난 몇 년간 전국의 명문 종가(宗家)들을 찾아다니며 조사했던 최숙경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종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떡 벌어진’ 제사상이다. 그래서 차례상도 일반 가정보다 더 잘 차릴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오해란다. 보통 떡국을 먹을 때 반찬 수를 밥과 국을 먹을 때보다 적게 하듯, 종가의 설 차례상도 술과 떡국, 포, 적, 전, 김치, 과실 등 ‘기본’ 차림새만 지킬 뿐 가짓수는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즉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야말로 종가의 가장 큰 책임이다. 세상이 변했다지만 요즘도 우리나라 종가들은 집에서만 1년에 평균 14회쯤 제사를 지낸다. 한 달에 한 번 이상꼴이란 얘기다. 묘에 찾아가 지내는 묘제(시제)를 포함하면 20회가 훌쩍 넘는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완간한 『종가의 제례와 음식』시리즈 16권에 소개된 종가들의 제례를 분석한 결과다.

종가란 큰아들[嫡長子]에게 대를 잇게 하는 중국 주나라의 종법제에서 유래됐다. 조선 중기 전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15세기만 해도 제사를 외손이 지내기도 했다”며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재산 상속이나 제사 등 모든 것이 ‘큰집’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인 제사에는 부모에서부터 고조부모까지 4대 조상에 대한 기제사와 함께 설과 추석 차례, 묘소에 가서 지내는 묘제 등이 있다. 명문종가엔 불천위(不遷位)조상 내외에 대한 제사도 추가된다. 불천위란 학식과 덕망이 높아 사당에서 신위를 없애지 않고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나 유림이 인정한 것을 말한다. 많은 종손과 종부가 ‘우리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무한한 존경과 자부심을 보이는 바로 그 ‘뿌리’다.

『종가의 제례와 음식』시리즈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고 있는 종가를 중심으로, 지역이나 당색 등을 고려해 연구소가 선정한 25개 종가와 청송 심씨 대종회, 진주 류씨 종중 등 27곳의 각종 제례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제례 절차나 상차림 방식은 예서들도 조금씩 지침이 다르다. 각 종가의 가풍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제례 때 종부의 역할만 해도 그렇다.

신위께 두 번째 올리는 술잔을 뜻하는 ‘아헌(亞獻)’의 경우『주자가례(朱子家禮)』 등에 주부가 하는 것으로 적혀 있다. 실제로 경북 안동의 보백당 김계행 종가 등에서는 종부가 두 번째 잔을 올린다. 그러나 같은 영남지방이라 해도 대구의 한훤당 김굉필 종가는 다르다. 여자들은 음식 준비만 할 뿐 제사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제사 음식의 종류나 가짓수도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불천위 조상이 생전에 제사 음식의 종류 등을 직접 정해 간소화할 것을 당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리 이원익의 4대손인 이존도는 “나를 제사지낼 때 제수의 경우 유과는 이미 쓰지 말라고 했고, 약반·밤·차는 식성이 평소 즐기지 않았으니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실학파 학자였던 서계 박세당도 자신의 제사상에 음식이 15가지를 초과하지 말고 떡은 큰 제사에 쌀 4되를 쓰라는 등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지난 수백 년보다 최근 10~20년 동안의 제례 변화가 훨씬 더 크다. 기일 전날 밤부터 상을 준비해 새벽에 지내던 제사를 오전 9시 이후 등으로 늦춘 종가나, 정부에서 권장했던 대로 신정에 차례를 지내는 종가, 묘제를 양력으로 지내는 종가도 있다.

무엇보다 종가 제례의 변화를 강요하는 요인은 일손 감소와 경제적 부담이다. 어쩔 수 없이 상차림을 간소화하거나 직접 음식을 만들지 않고 상품을 구입해 이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몇 년 전까지 종부의 자리가 비어 있었던 퇴계 이황 종가에선 100여 명이 참가한 묘제 후, 종손과 연세 많은 제관들을 제외한 손님들은 각자 식판을 들고 ‘셀프 서비스’로 비빔밥을 받아 식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종손들의 ‘세대 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젊은 세대는 ‘전업 종손’이 되는 것 자체를 꺼린다. 이들은 살기도 불편한 ‘종택 지킴이’ 역시 원하지 않는다.
김경선 성균관 석전교육원 교수는 “시대가 급변하고 있어 종가의 삶이나 제례도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다만 어떤 식으로 바뀌는 것이 나을지 판단하기 어려운 과도기”라고 말했다.

그는 “70년대 초 가정의례준칙이 나왔을 때만 해도 반발이 심했는데 그 후 불과 20년도 못 돼 ‘굴건제복’을 입거나 3년상을 하는 상주는 뉴스감이 될 정도가 됐다”며 “시간이 이런 혼돈을 정리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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