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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적, 관능의 실험…‘세기말 정신’이 통했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온 화가다. 영화나 드라마·광고 속에서 무심한 듯 벽에 걸려 있기도 하고, 벽지 등 생활용품에 그 이미지가 이용되기도 한다. 최근 7, 8년 사이에 부쩍 눈에 띄게 늘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전시회도 마련됐다. 2월 2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전이다. 전시에서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술관 12곳과 개인 소장자 등으로부터 모은 클림트의 작품 110여 점이 소개된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삐 변하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취향이 더 새로운 것을 향해 신속하게 옮겨 가는 시대다. 100여 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화가의 무엇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걸까.


그 해답을 ‘세기말’에서 찾아봤다. 클림트가 활동했던 100년 전과, 클림트가 새삼 각광받은 2000년대 초반 사이에는 세기말이란 공통점이 있다. 세기와 세기가 바뀌는 전환기에는 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세기말 증후군’이 퍼진다. 진보에 대한 희망과 몰락에 대한 불안이 공존하는 것이다. 세기말은 변혁의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그 세기말에 클림트는 시대를 앞서 갔다. 당대의 도덕적 규범을 깨뜨렸고, 화려한 색채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도전과 실험정신은 100년 후 다시 세기말이 됐을 때 다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의 작품에 ‘가장 비싼 미술품’이란 간판을 달아준 2006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는 클림트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의 1907년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이 회화 거래 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에 낙찰된 것이다. 작품 거래를 둘러싼 이야기도 재미있다. 작품의 모델인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소유였던 이 작품은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약탈돼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전시돼 왔다. 그러다 바우어 부인의 조카딸인 마리아 알트만은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해 2006년 1월 이 작품을 반환받았고, 곧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그림을 산 사람도 유명인이다. 바로 세계적인 화장품 그룹인 에스티로더의 로널드 로더 회장이다.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의 교외에서 가난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림에 재주가 있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빨리 돈벌이를 해야 했던 그는 유능한 장식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학생 시절에 이미 동생·친구와 함께 대형 건축물에 장식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새로 조성된 거리인 링 슈트라세 주위에 호화로운 건축물이 많이 건설되었기에 일감은 넉넉했고, 졸업할 때는 화가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그림의 양식은 아직 오스트리아 미술계를 주도하던 역사주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지만, 차츰 마술적 분위기와 섬세한 세련미를 특징으로 하는 클림트 특유의 화풍이 조금씩 나타나게 된다.

그의 화풍이 두드러지게 변한 것은 1897년, 클림트를 중심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빈 분리파를 결성하면서다. 분리파라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들은 보수적인 미술 아카데미와 미술가 협회가 주도하는 구태의연한 창작 관행과 과도한 상업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절대 왕정을 고수하면서 과거의 영화를 되살리려 부질없이 노력했듯, 미술계도 새로운 국제 동향과 동떨어져서 과거의 영광과 전통을 되뇌는 데 급급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외국의 새롭고 진취적인 동향을 국내에 소개한다는 목표를 세운 빈 분리파는 의욕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또 기관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뜻)을 발간하고, 분리파의 독자적인 전시장을 마련하는 등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이는 오스트리아 미술가들이 자기 만족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 전통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빈 분리파에게 또 다른 목표가 있었으니, 바로 대중의 감성을 일깨우고 삶과 예술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신봉한 총체예술 개념에 따르면 순수예술과 응용예술, 예술과 삶, 예술가와 장인, 건물과 장식 혹은 순수형식과 장식의 이원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실용성과 미학을 결합하고 예술을 실생활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도가 이어졌다. 클림트와 함께 빈 분리파를 이끌던 요제프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이 빈 공방을 설립해 건축과 건물장식은 물론이고 가구나 식기, 실내장식품들을 일괄 제작하곤 한 배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빈 공방이 디자인한 세련된 가구나 식기·벽지·직물 등은 빈 상류층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빈 분리파 회원 중에는 화가·조각가·건축가뿐 아니라 삽화가·가구공예가·직물공예가·책 디자이너·무대미술가같이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이런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클림트도 그랬다. 장식화가로 출발한 그는 독자적인 작품을 제작하게 된 후에도 같은 빈 분리파나 빈 공방의 일원인 건축가들의 건물을 장식할 그림이나 가구 디자인을 맡곤 했다. ‘베르 사크룸’의 삽화와 편집에도 관여했고, 직물 및 의상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다.

클림트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풍부한 장식성은 그의 이런 내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젊을 때부터 인정받고 살아생전 인기 있는 화가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한 요인인 장식성이, 얄궂게도 그의 그림이 반짝이는 표면 배후의 깊이 있는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도 했다. 미술사적으로 그의 위치를 새로운 사조나 양식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전통과 현대의 경계,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데서 찾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리라.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지금 우리 눈에도 지극히 현대적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까닭은 분명 금박 등 반짝이는 재료와 기하학적인 형태를 복잡하게 조합하여 몽환적이고 황홀한 세계를 만들어낸 그의 탁월한 디자인 감각에서 찾을 수 있겠다.

만일 클림트가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세상으로 온다면, 그래서 그의 복제화가 세계 곳곳에 걸려 있고 사람들이 그의 그림 이미지를 이용한 상품·장식물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이 100년 뒤에도 ‘잘나가는’ 장식화가라고, 삶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한 빈 분리파와 빈 공방의 의지가 현대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고 기뻐할까.

신성림 <미술평론가·『클림트, 황금빛 유혹』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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