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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英 피터 섀퍼 번안극 '相思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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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쿠우스’의 작가인 피터 섀퍼의 희극 ‘상사주’에는 잠자는 열정을 깨우는 주술이 담겨 있다. 웃음 뒤에 밀려오는 물음이 가볍지 않다.

요즘 서울 대학로에는 매일 30~40편의 연극이 올라 간다. 그래도 "꽝!"하고 가슴을 때리는 작품은 드물다. '웃음''코믹''배꼽' 등 껍데기에 불과한 수식어만 난무한다. 제대로 관객을 웃기는 작품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듯 한다.

그래서 연극'상사주(相思酒)'가 반갑다. 소극장 한양레퍼토리씨어터에서 장기 공연 중인 '상사주'에는 웃음이 있다. 경박한 유행어나 바보스러운 몸짓으로 끌어내는 1회성 웃음이 아니다. 실컷 웃고 난 뒤에도 "잊혀진 나의 열정은 어디에 있을까?" "그럼 내 삶의 방향은 어디일까?"라는 물음이 자신의 뒤통수를 친다.

'상사주'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 극작가 피터 섀퍼의 작품이다. '에쿠우스'를 통해 신과 인간, 이성과 감성의 까마득한 간격을 통해 구원의 현실성을 얘기했던 작가다. 그도 코미디를 썼다.'상사주(원제 Lettice and Lovage)'는 섀퍼의 몇 안되는 희극 작품 중 하나다. 딱딱한 이성과 말랑말랑한 감성의 대립은 '상사주'에서도 팽팽하게 살아있다. 원칙적인 삶을 사는 로테와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레티스, 대조적인 성격의 두 여주연공이 일으키는 화학 작용이 볼 만하다.

막이 오르면 경남의 진주 촉석루가 등장한다. 관광 안내원 한주연(임유영 분)은 연극적 열정이 넘치는 여자다. 딱딱한 설명에 관광객들이 하품을 하자 그는 안내 방식을 바꾼다. 연극적 상상력으로 논개를 되살려 낸 것이다. 관광객들은 감사 편지를 보낼 만큼 주연의 설명에 열광한다. 그러나 문화재청에선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조사관 지상애(황석정 분)를 현장에 보낸다. 결국 주연은 직장을 잃고 만다.

그 와중에 상애는 주연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한 발짝씩 주연의 삶에 발을 들여놓는다. 건조하기 짝이 없던 상애의 일상에 비가 내린다. 이미 박제가 된 줄 알았던 자신의 열정이 촉촉히 젖으며 깨어나기 시작한다. 극은 관객까지 자신의 잠자던 열정을 돌아보게 끔 한다.

번역극인데도 버터 냄새는 거의 없다. 오히려 김치 냄새가 폴폴 날 정도다. 영국 귀족의 대저택은 촉석루로,'찰스1세'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로 탈바꿈했다. 다분히 이국적인 분위기였을 원작을 우리 이웃의 이야기처럼 살갑게 풀어낸 번안과 연출 솜씨가 놀랍다.

임유영의 뻔뻔하면서도 당찬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찮다. 극 중 한주연은 꿈 속을 살 듯이 현실을 연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설득력을 얻지 못하면 자칫 황당한 인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배역이다. 임유영은 '낯 두꺼운' 노련미로 끝내 관객들의 가슴을 열어젖혔다.

단역이지만 홍서영(사무실 직원 이정희역)의 감초 연기도 반짝였다. 반면 김태훈(변호사역)의 발성은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유쾌한 웃음과 가볍지 않은 메시지. 얼핏 보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듯이 보이지만 '상사주'에도 결정적인 아쉬움은 있다. 김 빠진 맥주 같은 클라이맥스가 그렇다. 웃음을 계단 삼아 서서히 고조되던 1막의 긴장감이 2막에선 추리식 구성으로 확 빨려 들어간다. 재빠른 전환에 관객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다. 그리고 '결정타'를 기대한다. 그러나 극은 "괜찮아. 사소한 오해일 뿐이야"라며 등을 툭 치고 막을 내려 버린다.

고대하던 카타르시스는 온데간데 없다. 그래도 객석에는 찰싹거리며 여운이 밀려온다. KO를 노리는 '한 방'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잔 주먹'이 관객의 가슴에 멍을 남겼기 때문이다. 02-3141-8425.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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