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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1차 수술 … ‘관치금융 처방’ 잇따를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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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28면

기쁨·탄성·기대…. 2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분위기는 밝았다. 그러나 시장에선 다시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2차 금융위기 우려다. 리먼브러더스 등이 파산한 지난해 9월의 1차 위기와 달리 파산 사태는 없었다. 대신 망가진 금융 시스템에 대한 우려가 증폭됐다. 금융회사의 손실 누적이 금융 시스템을 오랫동안 무력화할 것이란 우려다. 돈이 돌지 않는 금융 시스템은 무용지물이다.

몰려오는 2차 금융위기

오바마의 처지는 76년 전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취임한 1933년 3월 4일에도 기쁨·탄성·기대가 넘쳤지만 시장에선 예금인출 사태(뱅크런)가 한창이었다. 그는 취임 하루 뒤인 5일 아예 미국 전체 은행 문을 닫아 버렸다. 그는 은행 장부를 샅샅이 살펴 살아날 수 있는 은행만 다시 영업을 하도록 했다.

오바마는 루스벨트처럼 전격적 조치를 취할 수 없다. 그때와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시절엔 고객이 은행을 믿지 못했다. 이번엔 은행이 고객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때는 은행이 망했다. 지금은 공적자금을 받아 무너지지는 않는다. 위기의 원인은 좀 다르지만 증상은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돌지 않아 실물경제가 위협받고 있다.

금융 시스템 복구 시급
“신용 시스템 위기는 미국과 유럽의 1차 금융 구제가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뉴욕대 교수의 평가다. 그는 공적자금이 금융회사 파산은 막았지만 금융 시스템 기능을 되살리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돈이 돌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1차 구제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독성 폐기물(부실 자산)을 제거해 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계획이었다. 미 재무부는 공적자금 7000억 달러를 동원해 금융회사 부실 자산을 처리하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계획을 바꿨다. 현금을 주입했다. 일단 파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11월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씨티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체이스 등 거대 은행 회장들을 불러 고압적으로 공적자금 신청서를 받아냈다. 그러곤 곧 공적자금을 기계적으로 투입했다. 일단 파산 공포는 진정됐다.

그러나 부실은 모기지(장기 주택담보대출)를 뛰어넘어 신용카드와 할부금융으로 번졌다.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실직자들이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의 자산은 급격히 부실화했다. 대출 능력은 더 떨어졌고 부실이 다시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미 정부는 허겁지겁 BOA 등에 추가로 공적자금 2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것으로 금융 시스템이 살아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루비니 교수는 부실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부실 규모가 3조60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달 초 부실은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최대 2조6000억 달러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2007년 현재 미 금융회사 전체 자본금 1조4000억 달러의 두 배 가까운 금액이다. 공적자금으로 메우면 미 금융회사들의 기존 주주 몫이 전액 사라지고, 정부의 지분만이 남는 셈이다.

국유화 논쟁 치열
영국 정부는 지난주 은행과 주택조합(빌딩 소사이어티)의 미래 손실까지 보증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돈을 가계와 기업에 빌려주라고 요구했다. 돈 떼일 가능성을 핑계로 대출을 꺼리는 금융회사들 때문에 극약 처방을 쓴 셈이다.

미국도 뒤따를 태세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후보자는 21일 의회 인준 청문회에서 “우리는 금융 시스템의 핵심 자리에 있는 금융회사들이 대출할 수 있도록 포괄적이고 극적인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의원들이 “배드뱅크를 의미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배드뱅크 방식이 효과적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럴지 살펴보고 있다”고 답변했다.

월가는 복합 처방을 예상하고 있다. 먼저 미 재무부가 씨티그룹에 했던 대로 추가 부실을 보증해 주면서 부실 자산을 대거 사들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필요하면 세금으로 은행 자본금을 불려 준다. 그 대신 금융회사가 누구에게 얼마를 새로 빌려줬는지를 보고받는 식이다.

미국은 90년대 초반 대부조합(S&L)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부실 자산을 대거 사들였다. 이른바 정리신탁공사 모델이다. 당시 미 정부는 4000억 달러를 들여 부실 자산을 사들였다. 나중에 그 자산을 다시 팔아 2800억 달러 정도는 회수했다. 나머지 1200억 달러는 손실로 처리했다. 세금이 그만큼 들어간 셈이다. 월가에선 그때보다 두 배 이상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약 8000억~1조 달러 정도다. 오바마 행정부가 준비 중인 경기부양과는 별도다.

미 정부는 모기지와 신용카드·할부금융 연체자들을 상대로 집단 워크아웃(채무구조조정)을 해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미 정부가 마련한 기준에 따라 금융회사들이 만기연장금리인하를 단행하는 것이다. 추가 부실을 줄여 보려는 의도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은행 국유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가 첫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은행의 지난해 손실은 405억 달러에 이른다. 추가 공적자금이 들어가면 영국 정부 지분은 70%에 이른다. 사실상 국유화가 이뤄지는 셈이다. 영국 정부는 그러나 “국유화는 아니다”고 밝혔다.

국유화와 함께 관치금융 논란도 일고 있다. 보수적인 미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블로그에서 “각국 정부가 ‘금융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적자금을 대거 투입한 각국 정부가 금융회사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회사 경영에 개입할 태세다. 우선 경영진 보수를 제한하려고 한다. 아직 대출 등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하지만 경기회복이란 명분에 밀려 은행들이 관료들이 판단한 기업이나 업종에 돈을 투입하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이나 유럽 은행의 처지도 비슷하다. 결국 금융의 시계추가 과거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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