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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시집 '북한기행' 국내서 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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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숨찬 보릿고개/끝은 보이지 않는다/죽기 전에 살아 넘어야 할/험난한 고갯길//그 앞에서/어른들은 망연자실/허공만 쳐다보고/애들은 울다 지쳐 쓰러져 있다…고개 너머엔 무엇이 기다릴지/허망한 꿈을 안고/타박타박 무거운 발길이/허기진 세상/가파른 황톳길을 기어오른다.” 중국 조선족 시인 김철(金哲)씨가 이달말께 시집'북한기행'을 문학사상사에서 펴낸다.95년과 96년 봄 두번의 북한기행중 느낀 것을 시로 담은 것.중국작가협회 중앙위원이며 1억명에 이르는 중국 소수민족 유일의 문예지'민족문학'주필인 金씨는 지금까지 25권의 우리말 시집과 2권의 중국어시집을 펴낸 1급 시인.우선'문학사상'6월호에 10편을 추려 발표한 시에는 굶주림과 분단이 통한(痛恨)으로 담겨 있다.

위 시'원산 가는 길목에서 만난 보릿고개'처럼 일제말이나 6.25직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주린 배를 물배로 채우고 넘었을 보릿고개의 악령이 북녘 전체를 덮고 있다.아니 그 아귀(餓鬼)에 끝내 끌려가고야 마는 곡소리가 시행 사이사이에서 들린다.

“상여가 떠나간다/얼마나 많은 허기진 세월을 지새고/지쳐 쓰러져 가는가//묵묵히 고개 숙여 소리없는 장렬은/유령처럼 흐른다//집 앞 헐벗은 은행나무에/걸려 있는 흰 천조각 하나/혼백을 보내는 여윈 손길처럼/젖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밤하늘에 날리고 간/마지막 남긴 말은/“저승에 가면/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겠지요.”//불꽃처럼 별무리가 쏟아지는 밤/아무도 출구를 못찾는 미로에 서서/하늘을 우러러 땅을 두드리며/통곡의 밤을 지새울 뿐이다.”'유령처럼 흐르는 상여행렬'전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띌세라 밤에만 상여를 나가게 하는 기막힌 북녘의 현실.그것도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말해야만 하는 복장터지는 현실을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신의주에서 판문점까지 이르는 여행길에 자연과 인정을 읊은 시에도 북녘,나아가 민족의 아픈 현실은 곳곳에 드러난다.

“고려땅 예쁜 처녀가/보쌈김치 절구다 말고/양념 묻은 젖은 손을 미소진 입가에 대고/낯선 길손을 반겨줄 법도 한데/거리는 대낮에도 인적이 끊일락 말락/4월의 바람에도 으시시 몸이 시리다//저기-/고려성이 천년/풍운을 잠재웠거니/바람 잦은 송악산에/모진 광풍이 다시 불면/어떻게 하나?/내일의 쾌청을 비는 마음/판문점 지붕 위에/간절한 소원 하나 걸어두고 떠난다.”'옛 왕도 개성에서'후반부다.6.25때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민속의 거리를 지나며 쓴 시다.산천과 마을은 그대로인데 이 시에서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4월의 살랑살랑한 봄바람에도 고려의 왕도 개성에서 으스스한 찬바람만 옷깃을 여미게 할 뿐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간절한 소원,통일을 판문점에 걸어두고 길을 떠난다.그리고 95년 4월 평양 교외의 산기슭에 있는 주체사상과학원에서 황장엽 비서를 만나“이제 계급투쟁보다 인민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등 밤새 나눈 이야기도'서울의 황장엽씨에게'란 시에 담았다.

“그해 봄/당신과 나/민족의 슬픈 운명을 술잔에 가득 부어잡고/말없이 건배를 했지요//취중의 방담이라고 하기엔/너무도 진지했던 당신의 모습/공화국의 아픔이 파르르 입술에서 떨고/돗수 높은 안경이/흐려지는 까닭을/내 심장의 박동은 알고 있었지요//부황 뜬 겨레의 아픔을 개탄하며/전쟁의 불씨를 짓뭉개버리고/온 세계 모든 지구촌 시대에/남북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고 토로하던/당신의 열변이 술보다 진하게 나를 취하게 했지요.” 이 시들을“남북의 형제가 얼싸안고 춤을 추며 환희에 휩싸일 통일의 그날을 염원하며 남북의 동포들에게 바친다”고 밝힌 김씨는 시집 출판 교섭차 방한했다가 지난 2일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김철 시인이“성급한 네 마음은/폭포가 되고/못견디게 아쉬운/석별의 정은/바위를 훑어가며 소근거리는가”라고 읊은 금강산의 벽계수.북녘기행 시편들에는 산천은 의구한데 인간세상은 굶주림으로 가득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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