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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자기관리’ 한상률 국세청장이 낙마한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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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준비된 청장’.

15일 사표를 낸 한상률 국세청장이 1년2개월 전 청장에 임명됐을 때 국세청 직원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철저한 자기 관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실세를 업고, 출신 지역을 발판으로 갑자기 청장이 된 일부 전직 청장과는 다르다는 평가였다. 익명을 요구한 국세청 관료는 “청장을 향해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하고, 관리해 온 인물”이라고 평했다. 전군표 전 청장이 국세청 설립 후 처음으로 재직 중에 구속된 상태라 기대는 더 컸다.

한 청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취임 일성은 ‘환골탈태’였다. 윤리의식을 거듭 강조했다. “세상은 변화하는데 우리가 변화하지 않으면 국민은 우리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수장이 되고 나서도 자기 관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골프도 끊었다. 사석에선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골프채를 잡았다. 경주세무서 준공식에 참석하러 간 길이었다. 골프는 경주에서 쳤지만 대통령 고향인 포항의 기업인이 함께 라운드했다. 만남은 대구의 횟집에서도 이어졌다. 역시 포항 사람들이 여럿 모였다. 시사저널은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과 가까운 사이”라고 보도했다. 이 자리에는 대통령의 동서인 신기옥 경북고 총동창회 부회장도 있었다. 한 청장은 13일 “(신기옥씨가) 누군지 몰랐고 나중에서야 누군지 알았다. 단독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우연히 합석을 하게 돼서 만났다”고 해명했다. 국세청 간부도 “지역 인사들이 만나자는데 그냥 차 한잔 하고 올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곧바로 투서가 청와대로 날아들었다. 한 청장이 찾았던 횟집은 대구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명소다. 그만큼 감시의 눈도 많은 곳이다. 국세청장이 골프를 하면서 가명을 사용해봐야 비밀 유지가 잘 될 리 없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는 특수 조사를 담당하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장을 지냈다.

‘준비된 청장’ 한상률은 왜 자기 관리의 끈을 놓았을까. 그것도 개각을 코앞에 둔 시점에. 사의를 표명한 후 한 청장과 국세청 간부들이 만난 자리에서 나온 말 속에 답이 있다. 한 청장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사람이 일을 더 잘해보려고 하다 이렇게 됐다”고 했다.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인사를 앞두고 한 청장이 조급해졌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관계자는 “직원들이 피로를 느낄 정도로 한 청장은 열심히 일했다. 꼼수를 부리는 사람도 아니다. 위험한 선택을 한 데는 절박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적 쇄신 얘기가 나오는 4대 권력기관장(검찰총장·경찰청장·국가정보원장·국세청장) 중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사람은 한 청장과 임채진 검찰총장이다. 한 청장에겐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을 무혐의 처리했고, 임기가 보장돼 온 검찰총장과는 처지가 달랐다. 물론 1년 넘게 권력기관을 이끈 한 청장에게도 우군이 적지 않았다. ‘그림 상납’ 주장이 불거졌을 때 그래도 유임시켜야 한다는 진정이 이어졌다. “과정이 석연치 않은 폭로를 인정하는 꼴이 돼 오히려 기강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대구·경북 지역 인사 일부도 구명에 나섰다. 한 청장이 15일 오후 “사의를 표명한 적도 표명할 계획도 없다”고 말한 것을 ‘버티기’로 보는 해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정권의 핵심부는 그림 문제가 부담스러웠다. 경주·대구 회동은 대통령까지 함께 엮일 수 있는 정치적 소재여서 더욱 그랬다. “정권에 부담이 되는 사안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한 청장은 15일 밤 사의를 표명했다.

한 청장의 사퇴는 개인에게만 상처가 된 것이 아니다. 국세청 조직에 파인 상처는 크고 깊다. 내부에선 ‘의리’라고 하고, 밖에선 ‘카르텔’이라고 부르는 조직의 응집력이 깨졌다. 전군표 전 청장이 ‘사실무근’이라 해명했지만, 그림 문제를 꺼낸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그녀가 그림 처분을 맡긴 가인갤러리 대표의 남편은 현직 국세청 간부다. 고속 승진을 해 온 그는 한 청장 재직 시절 주춤했다. 곧 해외로 교육 파견을 가야 할 처지였다. 국세청 내부에선 “계획된 폭로”라는 얘기가 돌았다. 한 청장은 무엇보다 자신의 외국 방문 중에 문제가 불거진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당사자들은 펄쩍 뛴다. 음모론으로 물타기를 하지 말라는 항변도 했다. 국세청의 한 평직원은 “사실 여부를 떠나 씁쓸하다. 전 전 청장이 수뢰 혐의로 구속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내부 인사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지역에 따라 청장이 결정되고, 청장이 절대적인 인사권을 행사하고, 인사 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는 조직 체계가 한계에 달하면서 나온 균열이란 것이다.

이 때문에 현직 국세청 간부가 승진해 청장이 되기가 이번엔 쉽지 않아 보인다. 1991년 추경석 청장을 시작으로 한 청장까지 8명이 국세청 내부에서 승진해 청장이 됐다. 단 한번 예외가 기획재정부 세제실 출신의 이용섭 전 청장(2003~2005년)이다.

새 청장을 경합하는 인물은 허용석 관세청장,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다. 허용석 관세청장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을 지냈다. 오래전부터 청장 물망에 올랐다. 재정부 시절 직원이 뽑은 ‘닮고 싶은 상사’에 3년 내리 선정됐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전북에 뿌리를 두고 있어 지역 배분의 이점도 있다. 오대식 전 서울청장은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다. 국세청 내부의 신망이 두텁고, 부드러운 리더십이 장점이다.

‘천재형 관료’로 분류된다. 9급으로 시작해 대전지방국세청장을 지낸 후 민간에서 5년간 활동한 조용근 한국세무사회장도 후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 청와대는 순수 민간 출신을 우선 고려하되, 여의치 않으면 유력 후보들 중 한 사람을 낙점할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되든 어깨는 무겁다. 전임 청장 세 명이 연속으로 불명예 퇴진을 했다. 고리를 끊지 못하면 국세청은 ‘손봐야 할 곳’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청와대 태스크포스(TF)에서 마련 중인 국세청 조직 개편 방안도 실행해야 한다.

국세청은 지난 8일 성적표를 하나 받았다. 한국생산성본부가 조사한 ‘국세행정 신뢰도 평가’ 결과였다. 점수는 71.8점. 지난해 5월 조사보다 9.3점이 상승했다. 한 청장은 지난해 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 “반드시 5점 이상 올리겠다”고 공언했다. 약속은 지켰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국세청을 떠나야 했다. 다음 조사 결과는 과연 몇 점일까.

김영훈 기자 filic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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