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e칼럼

고시낭인과 로스쿨낭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낭인(浪人). '일정한 직업이나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고시(考試)'라는 단어와 합성돼 묘한 이미지를 생성해 냈다. 고시낭인. 국어사전에 실릴 법한 정확한 뜻은 없지만, 고시를 연거푸 떨어지고 고시촌 주변을 맴도는 사람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인다. 고시낭인이 심해지면 '고시폐인(高試廢人)'이 된다. 역시 은어다. '고시 공부에 청춘을 바쳤으나 합격하지 못해 취직할 시기마저 놓쳐 어쩔 수 없이 고시 공부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신문지상에 실릴 정도로 일반 단어로 굳어졌다. 고시낭인의 폐해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다. 많은 전문가들 역시 로스쿨 제도의 필요성으로 '계속되는 고시낭인 생산으로 인한 국가 인력의 낭비 방지'를 읊는다. 많은 우수 인력이 아직까지 사법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소위 '고시낭인'이 되어 사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시낭인은 왜 생겨날까? 사실 답은 쉽다. 사회에서 법조인을 요구하는 수는 적은데, 법조인을 되길 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의리와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서로의 관계는 법률관계가 아닌 호의관계(법적으로 구속받으려는 의사 없이 행해진 생활관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한 가족이 소송과 일절 상관없이 사는 것도 일반적. 인구도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수의 법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그럼에도 다른 직업에 비해 높은 보수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아니면 자아 실현, 법조인에 대한 꿈을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법조인을 꿈꾼다. 1000명을 뽑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법조인의 길은 '좁은 문'이다.

로스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로스쿨을 나와서의 진로에 대해 명확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미국처럼 정착할 것인가 일본처럼 실패할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변호사 시장이 넓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로스쿨의 입학은 갈수록 치열해 질 것이라는 점이다. 아직도 법조인을 꿈꾸는 사람은 많기만 하다. 로스쿨을 준비하는 학생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변호사자격 시험이 논의되고 있고, 자격획득에는 검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로스쿨을 졸업한 '로스쿨낭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물론 '고시낭인'을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누구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권리가 있다. 국가 인력의 낭비라고 말해도 남의 꿈을 포기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1군에서 훌륭한 성적을 내기위해 땀을 흘리는 2군의 운동선수는 '노력과 정열'이라는 이름으로 칭송받는데, 법조인이 되기 위해 땀 흘려 공부하는 학생은 '낭인'이라며 매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들의 노력 역시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여 질 필요도 있다.

하지만 오랜 공부는 수험생을 지치게 만든다. 고시낭인들 역시 괴로움을 느끼고 하루빨리 꿈을 이루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고시낭인을 무작정 비하하거나, 사회 낭비라고 하기 보다는, 이들이 왜 낭인이 되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낫다.

사법시험 2차를 여러 번 떨어지고 다시 1차를 연거푸 떨어진 한 고시생이 필자가 운영하는 카페에 이런 글을 올렸다. "몇 년 전 수석합격자의 글을 보라"며 깊이 있는 교수님의 교과서를 몇 권이고 보지 않으면 십중팔구 떨어지고, 합격하더라도 저조한 성적을 받는다는 글이다.

과연 그럴까? 근 몇 년간 신림동 교재로 정리하지 않은 고득점 합격 수기는 찾기 힘들었다. 필자 주위엔 어린나이의 합격자들이 많은데, 깊이로 유명한 교수님의 책은 건드리지도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그들은 시험에 적합하게 정형화된 교재를 찾아 그 책을 중심으로 수없이 반복하고 굉장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나아가 사법연수원에서조차 엄청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런 어린 합격생들이 공부를 오래한 고시생들보다 법학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이 아닌 수험을 통해 어린 합격생들은 예비 법조인으로서, 그리고 우수한 인력으로서 먼저 사회에 나가고 있다.

이는 로스쿨에서도 적용되리라고 본다. 로스쿨에서 어떠한 교육이 이루어질지 모르겠으나, 기존 법학과 교수님 혹은 실무가 출신 교수님의 강의가 일반일 것이다. 변호사 시험제도가 실시된다는 가정 하에, 강의가 수험에 적합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법학의 난이도와 광범위성에 비추어 로스쿨에서의 강의만으로 합격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로스쿨 커리큘럼의 깊이와 병행하는 자신만을 위한 수험 로드맵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로스쿨 시대에서도 일정부분 수험 계획에 따라 '수험생의 공부'를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빠른 시간에 고시낭인이나 로스쿨낭인의 꼬리표를 떼어버리기 위한 '수험생의 공부'는 어떤 것일까? 조기 합격생들은 수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법시험이든 로스쿨 입학전형이든 변호사자격시험이든 모두가 '법조인'이라는 자격을 위한 시험이다. 여기저기 한 눈 팔거나, 너무 깊이 공부하거나, 아니면 너무 얄팍하게 공부하면 진짜 '낭인'이 될 수도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정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오랜 공부는 자신과 주변을 괴롭게 할 것이다.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열의와 주변에 대한 관심을 잠시만 덮고, 수험생으로서의 본연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새 예비법조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장은호 칼럼니스트 jgoon8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