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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왜 화장실 천장 위에 녹음기 비슷한 것이 놓여있는 것인가.원지는 그것이 도청 녹음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그 속에 든 테이프를 꺼내면서 비로소 그것이 도청과 관련이 있는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지는 그 물건을 다시 화장실 천장 위에 올려놓고 테이프만 들고 나와 카세트 겸용 라디오에 집어넣고 들어보았다.

“곗날을 잊어먹으면 어떡해요? 27만원 얼른 온라인으로 계주한테 송금하라니까요.” 곗돈 문제로 이브 미장원 원장 아줌마와 원지가 통화한 내용이 먼저 흘러나왔다.역시 도청이었구나.원지는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강도에게 성추행을 당했을 때와 비슷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자기를 누구보다도 믿고 사랑한다고 여겼던 남편이 아내인 자신의 전화 통화를 엿듣기 위해 도청 녹음기를 화장실 천장 위에 숨겨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배신감마저 안겨주었다.

테이프에서는 원지가 동네 아줌마나 동창들과 나눈 시시한 통화 내용들이 흘러나오고,주애가 자기 친구들과 나눈 통화,남편 구환이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히히덕거린 농담들이 흘러나오다가 더이상 녹음이 되지 않았는지 치지직거렸다.그 치지직 거리는 소음을 그대로 둔채,원지는 무엇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이리 숙이고 저리 젖히면서 장롱 속을 뒤지고 침대 밑을 살펴보고 구환의 가방들을 뒤졌다.

그러다가 각종 도구들을 넣어두는 구환의 수리함 속에서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있는 테이프 하나를 발견하였다.이 테이프는 왜 하필 이렇게 은밀한 곳에 보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원지는 치지직거리고 있는 테이프를 꺼내고 수리함에서 가져온 테이프를 카세트에 집어넣었다.이상한 언어들이 뒤섞이다가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여보세요,전화 바꿨습니다.나야,우풍이.니키 마우마우단.우풍아,너 어디서 전화 거는 거야?비트에 전화를 놓았을 리는 없고,너 혹시 집으로 돌아온 거 아냐?…” 전혀 낯선 아이들의 목소리였다.원지는 우풍이라는 이름을 경찰서에서 들은지라 부들부들 또 몸이 떨렸다.우풍이라는 놈이 방에 들어와서 루주 묻은 휴지만 훔쳐간 것이 아니라 국제전화까지 하고 갔구나.다음달에 엄청나게 나올 국제전화료를 생각하니 생돈을 절취당한 기분이었다.

“정당방위라면 정당방위고,사고라면 사고고.아무튼 니키 마우마우단이 사람을 죽였어.재판을 해서 처단해버렸어…문제는 그 시체가 우리 비트에 아직도 있는데,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감쪽같이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거야.준우 네 생각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원지는 마치 방 한구석에 시체가 놓여있기라도 한 것처럼 치를 떨었다.

글=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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