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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보석상들 중국에서 황금을 주무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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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전라북도 익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보석 생산 단지였다. 그러나 IMF 때 이곳 보석상들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머나먼 중국 칭다오(靑島)로 떠났다. 치솟는 임금으로 점차 썰렁해지는 익산에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칭다오에서 익산 보석상들은 황금을 주무르고 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손재주로 중국을 홀리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익산 보석상들의 중국 성공 스토리를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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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동지에 춤을 췄다(雪舞冬至).” 중국 칭다오의 한 지역 신문은 지난해 12월 22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날 칭다오엔 유례없이 큰 눈이 왔다. 5년 만에 내린 폭설이라고 한다. 쌓인 눈만 4.4㎜. 칭다오시의 460개 도로가 꽉 막혔고, 눈을 치우는 데 279대의 차량이 동원됐다.

IMF 때 30여 상인 칭다오로 건너가 … 탁월한 손재주로 업계 장악 #중국을 홀린 익산 보석상들

칭다오의 일간지 칭다오조보(靑島朝報)는 이날의 풍경을 ‘전투(戰鬪)’라고 기록했다. 이곳에서 전투는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한국 기업인들에겐 특히 그렇다.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하루 하루를 ‘전장’에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소연한다. 세계 경제의 마지막 버팀목으로 지목되던 중국. 그러나 중국을 대표하는 ‘생산공장’으로 명성을 쌓았던 칭다오도 점차 삭막해지고 있다.

불 꺼진 칭다오에 비친 한 가닥 불빛

칭다오 국제공항에서 20여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와리촌(瓦里村). 불과 2년 전만 해도 이곳은 소규모 영세업체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뜨거웠다. 와리촌의 비포장 거리는 퇴근시간만 되면 쏟아져 나오는 공인들로 흙먼지가 크게 일곤 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곳곳에 ‘공장문 닫습니다(工場門閉鎖)’ ‘가게 세 놓습니다(有房超稅)’라는 문구가 나붙어 있다. 철문을 굳게 닫은 공장 근처를 기웃거리면 여지없이 경비들이 나와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거리에서 만난 왕커구이(王可貴·54)는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한국 기업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직원들에게 정기휴가를 보냈다. 웬일인가 했다. 그런데 와보니 문을 닫은 게 아닌가? 도망갈 때 가더라도 월급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기업만 야반도주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기업이 도망갔다는 말은 못 들었다”는 냉랭한 답이 돌아온다. 칭다오는 한국 기업의 최대 투자처였다. 한때 한국의 중국 투자 가운데 33.3%가 칭다오에 집중된 적도 있다. 지금 사정은 180도 다르다. 칭다오 대외무역합작국 통계자료에 따르면 야반도주를 한 한국 기업은 206곳에 달한다.

주로 액세서리·봉제·피혁 등 영세업체들이다.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집약 특성을 가진 업체들이 야반도주를 한 셈이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희망적인 메시지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건너간 보석상인들이 뛰어난 손재주로 여전히 황금을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칭다오엔 현재 한국에서 건너간 크고 작은 귀금속 업체들이 30여 개 몰려 있다. 이들의 실적은 놀랄 만하다. 극동보석은 연간 4000만 달러 이상의 수출을 하고 있고, 일본에서 ‘신라’라는 브랜드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라보석유한공사도 월 20만 달러 넘게 수출한다. 칭다오 보세구역에 둥지를 튼 다른 귀금속 업체들도 연간 수천만 달러를 수출한다.

특이한 점은 이들을 ‘익산 보석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전라북도 익산(옛 이리시)은 ‘보석도시’로 유명하다. 1975년 귀금속보석가공단지가 조성된 후 그렇게 불렸다. 그러나 외환위기 전후, 귀금속 제조기술자의 상승하는 인건비를 해결하지 못해 대부분의 귀금속 업체가 칭다오로 거점을 옮겼다.

그래서 외환위기 전후, 칭다오에 둥지를 튼 귀금속 업체를 통칭해 ‘익산 보석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익산 보석상들의 손기술은 세계 최고다. 특히 금형·세공기술은 따라올 자가 없다는 평가도 받는다. 현지 주민들의 평도 그렇다. 칭다오 상업보행가거리 타이둥(台東)에는 짝퉁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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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작업복을 입은 중국 여공이 보석을 다듬고 있다. 시끄러운지 MP3를 듣고 있다.

각종 만물상이 있는 곳으로, 우리로 따지면 남대문시장 같은 곳이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가게의 간판에 한글이 쓰여 있다는 점이다. 가령 ‘東北大豆腐’ 밑에 ‘한국기계두부’라는 한글이 붙어 있는 식이다.

그만큼 중국인만큼이나 조선족, 한국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칭다오 시정부에 따르면 투자업체 및 상사 주재원 등 교민은 8만5000명에 달한다. 상주 조선족은 12만 명, 한국인 여행자는 연간 51만 명이다.

이곳에서 만난 중국인 여성 리화(李嬅·21)는 “한국 보석의 세공기술이 뛰어나고, 뒷마무리도 좋다”고 했다. 대놓고 “중국 제품은 투박하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많았다. 한국산 보석 제품이 칭다오를 홀리고 있는 것 같다.

익산 보석상은 대부분 수출업체다. 중국 내수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익산 보석상은 거의 없다. 이들에게 칭다오는 그야말로 생산기지일 뿐이다. 그래서 현지인들이 말하는 한국산 보석은 익산 보석상들이 만든 제품이 역수입된 것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익산 보석상들이 머나먼 칭다오에 온 후 번창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끊임없는 중국 공인 끌어안기와 문화교류 노력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0년, 중국 칭다오에 정착한 정경호 신라보석 유한공사 총경리의 이야기다. 이 회사는 1993년 중국 창사(長沙)로 생산기지를 옮겼다가 2000년 칭다오로 왔다. 생산기지를 칭다오로 옮기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시정부의 전폭적 지원에 따라 1만㎡ 규모의 공장을 싼값에 임차했다. 이면삼감(二免三減)이라는 세제혜택도 받았다. 2년간은 세금 면제, 3년 동안은 세금 감면이라는 뜻이다. 신라보석의 큰 골칫거리는 다름 아닌 중국 공인들이었다. ‘쉥~.’ 공장 구석구석에 원자재를 깎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이 공장엔 총 200여 명의 공인이 근무 중이다. 세공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대부분 MP3를 듣고 있다. 얼핏 보기엔 70년대 한국 공장을 연상케 한다. 50분 근무에 10분 휴식이라는데, 휴식시간이 되자 여공들의 수다가 이어진다. 공인 가운데 60%는 여자다. 낡은 남색 작업복과 기름때 묻은 장갑을 끼어서 그런지 다소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실은 20대 초반이 대부분이다.

이 공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곳곳에 붙어 있는 다음과 같은 문구다. “한국 보석이 세계에서 가장 매끄럽고 아름답다(在世界上的珠最光滑美).” 익산의 자부심이 이역만리 칭다오에서도 느껴진다. ‘그래도 공인들이 순진해 보인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핏대를 세운다. “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여기에서 진짜 힘든 게 공인 다루는 거예요.”

중국 공인들 마음을 사로잡다

정 총경리는 “칭다오에 온 지 7년 됐는데, 우리 회사를 거쳐간 공인만 5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평균 잡아 하루 8명의 공인이 그만뒀다는 이야기다. “싫은 소리 들으면 다음 날 나오질 않아요. 세공기술을 가르쳐야 하는데, 줄줄이 집으로 가니….”고육책으로 정 총경리는 신입 공인을 뽑기 전 일종의 ‘집체교육’을 실시했다.

우리로 따지면 극기훈련인데, 회사 차원에서 실시했다간 혹여 문제가 될 것 같아 청양취(城陽區) 공안당국의 협조를 받았다. 말이 집체교육이지 과목은 별 게 아니었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간단한 체력훈련을 하는 게 전부다. “그런 교육까지 시키는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그렇다고 품질 나쁜 제품을 바이어에게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창다오는 어떤 곳?

2007년 기준/ 출처: 칭다오 KOTRA

□ 면적 1만654㎢(서울의 약 17.6배)
□ 인구 760만 명/ 도심인구 275만 명
한족 및 조선족, 회족 등 38개 소수민족(시 총인구의 0.41%)
- 투자업체 및 상사 주재원 등 교민 : 약 8만5000명(유학생 포함)
- 상주 조선족: 12만 명
- 한국인 여행자: 51만 명
□ 기후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온대 해양성 기후 특성 강함
- 연평균 기온 12.2도
□ 관할지역 7구 5현급 시
- 이 밖에 칭다오경제기술개발구, 보세구, 하이테크산업개발구, 칭다오수출가공구 등 4개 국가급 대외개방중점구 존재
□ GDP 3786억 위안, 1인당 GDP 5만86위안
- 전년 대비 16% 증가
□ 교역액 수출 283억 달러(전년 대비 20.6% 증가), 수입 174억 달러(전년 대비 11.3%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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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엔 600여 귀금속 도소매업체가 입주해 있는 칭다오국제공예품성 1기가 있다. 입주 업체의 70%는 한국 기업이다.

또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흔히들 중국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주의 문화’에 젖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게 정 총경리의 말이다. 이곳 공인들은 돈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으면 당장 보따리를 싼다. 파벌까지 심해, 임금 문제가 집단 난투극으로 커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정 총경리는 일찌감치 팀제를 운용했다. 팀장은 물론 한국 기술자에게 맡겼고, 잘한 팀엔 기본급의 30% 이상 인센티브를 줬다. 현재 신라보석은 익산과 비슷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만큼 공인들의 세공기술이 늘었다. 10년 동안 꾸준히 근무하는 공인도 2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의 연봉은 5000위안 이상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입사하기 힘들다는 하이얼(Haier) 초임(1만8000위안)의 3분의 1 수준으로, 농촌 출신이 많은 칭다오에선 높은 연봉이다. 중국은 도시 또는 농촌 출신이냐에 따라 임금 차이가 크다. 이 때문인지 이들을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공인도 많아지고 있다.

이 공장의 조선족 여공 김경화(金慶花·29)씨는 “지금은 경력이 많이 쌓인 덕분에 웬만한 세공은 잘할 수 있다”며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환하게 웃었다. 열아홉 살인 남자 공인 왕자이(王摘)는 “10년 정도 근무한 팀장처럼 매끄러운 보석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니하오마?” 김영후 한미래주보유한공사 총경리는 공인을 만나자마자 먼저 고개를 숙였다. 나이가 제법 많아 보이는 공인이다. 예우를 해준 것일까? 공장으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10대로 보이는 남자 공인을 만나자 또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니하오마”라고 한다. 기자와 만난 지 30분 만에 그가 고개를 숙인 횟수는 총 20여 차례.

김영후 총경리는 “중국 공인들에게 ‘내 회사’라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라보석이 다소 기계적 교육에 신경 썼다면 김 총경리는 낮은 자세를 통해 중국 공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이 생산공장의 여자 공인 조선족 김송화(金松花·22)씨는 “사장님이 먼저 인사하는 게 쑥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나를 존중하는 것 같아 기분 좋다”며 웃었다.

익산 보석상들은 자존심이 무척 세다. 먼저 낮춘다는 것은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 그가 먼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10여 년 전 칭다오에 온 김 총경리는 16명의 관리자를 두고, 해외 바이어를 만나는 데 주력했다. 본사로부터 월 150만 달러 매출을 200만 달러까지 올리라는 특명도 받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불량제품이 속출했다. 이로 인해 바이어들의 손가락질과 외면도 받았다. 생산현장을 꼼꼼히 점검해 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중국 공인들의 손기술이 조금 부족했지만 어차피 한국인 관리자가 보완해주는 시스템이었다. ‘난제’였다. 김 총경리는 공장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중국 공인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 중반. 체력이 달리고 건강도 걱정됐지만 익산의 자존심을 고수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중국 공인들을 익산의 세공기술자로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어차피 이들은 우리 회사를 외자기업쯤으로 여겼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죠. 애사심은 당연히 없었고요. 애사심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품질이 달라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들뻘 되는 중국 공인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주인이다’는 점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이 회사의 분위기는 칭다오에서 유명하다. 이직률은 여전히 높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공인이 많아졌다. 매출도 목표치인 월 200만 달러까지 올랐다.

한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던 바이어들도 이제는 익산 때와 마찬가지로 대한다. 중국 공인들의 속내를 꿰뚫어본 게 주효한 셈이다. 오후 6시. 퇴근시간이다. 수많은 공인이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서 김 총경리에게 “안녕히 계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니하오마’에 대한 답이 한국말로 돌아오는 것이다. 칭다오에서 많은 수출을 하는 익산 보석상의 힘은 ‘문화 교류’에서 나오는 것 같다.

텃세 부린다고 물러나지 않는다

“중국 공인 때문에 힘든 것만은 아닙니다.” 일부 익산 보석상은 정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제아무리 한국 사람이 많아도 외국은 외국”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수차례 요구했을 정도로 예민한 이야기다. 이들에 따르면 익산 보석상인은 두 부류로 나뉜다.

정부 관료를 많이 만나든지, 아니면 피해 다니든지…. 한 익산 보석상의 말이다. “여기 관료들은 부패의식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생산공장에 오면 조그만 선물 하나라도 줘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 몇 번 그냥 넘겼더니 일이 터졌습니다.” 때는 2003년이다. 이 익산 보석상은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월 매출은 20만 달러를 넘어섰고, 공인도 사상 최대인 3000명까지 늘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정부에서 호출했다. 공장 폐수를 함부로 버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돈 안 찔러줬다고 앙갚음하는구나’라며 법정에서 보자고 맞받아쳤다. 증거도 확실하고, 제보했다는 농민의 농장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혹여 폐수가 잘못 새어나갔다고 해도, 그쪽까지 갔을 리 만무했다.

승리를 장담했지만 이 익산 보석상은 아직도 소송 중이다. 입이 닳도록 항변해도 받아주질 않는다. 이 보석상은 소송 때문에 보석 수만 개를 팔고도 남을 만큼 손해를 봤다. ‘한국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칭다오로 생산기지를 옮겼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정직한 보석상이라는 사실이 입소문을 탔는지, ‘거래하겠다’며 찾아오는 해외 바이어가 조금 늘었다. “어디서든 정도는 통하게 마련입니다. 이상한 압력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오히려 품질향상에 혼신의 힘을 쏟는 등 반대급부도 있습니다. 거래선도 늘었고, 중국 공인들의 기술력도 한층 발전했습니다. 익산의 명성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익산 보석상들을 만나면서 칭다오에 얽힌 전설을 들었다. 섬이 아닌 칭다오에 왜 ‘도(島)’를 썼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칭다오 해안선을 따라가면 소청도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이 섬엔 한 어부가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선녀와 사랑에 빠졌다. 이뤄질 수 없는 비밀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신(神)의 분노를 샀고, 선녀는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선녀가 생전에 어부를 기다리며 불던 비금 소리가 섬 주위를 에워싸면서 사람들을 홀렸는데, 그때부터 이곳 사람들은 이 섬을 금도라 불렀고, 후일 靑島가 됐다(금의 중국 발음은 청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비금을 지금은 익산 보석상들이 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끊임없는 품질개선과 정도 경영이 빚은 아름다운 귀금속이 금도(칭다오)의 혼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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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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