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기로에 선 스위스은행 비밀주의 - 로스앤젤레스타임스 11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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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정부 산하 11개 기관이 참여해 지난주 발표한'스위스 금'에 관한 보고서는 스위스가 더럽고 허점많은 나라라는 인상을 준다.스위스정부는 보고가 나가자 성명을 발표해 작고 가난한 스위스가 세계 제2차대전 당시“나치와 파시스트 국가에 포위됐었다”는 점을 새롭게 상기시키고 나섰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발표한 보고서는 스위스가 전쟁중 취한 행동 이상의 것을 다루고 있다.스위스가 전쟁뒤 나치가 훔친 금을 원소유자들에게 돌려주도록 요구한 연합국들을 속이고 나치를 도운 일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이 폭로됨으로써'작고 가난한 스위스'라는 변명은 일거에 근거를 잃었다.오늘날 스위스가 주장하듯 나치의 위협 앞에 겁먹은 쥐였던 스위스는 전쟁뒤 금을 돌려주라고 요구한 연합국들에 사자처럼 대항했다.동시에 스위스은행들은 유대인과 그 가족들이 예치한 금을 찾기 어렵도록 온갖 장애를 만들어냈다.

스위스가 보여준 범죄자에 대한 동정심,나아가 그들과의 연대감은 피해자들을 모욕했고 그들의 권리에 냉담했다.

이같은 전통은 오늘날의 스위스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다.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이 수년동안 약탈해 쌓은 재산을 갖고 탈출했을 때 스위스는 악명높은 비밀보장법을 내세워 그의 부정한 재산을 보호해준 것으로 알려졌다.마약왕이나 독재자들은 여전히 스위스에 자신의 돈을 맡겨둘 수 있다.전세계 각지의 탈세범들은 스위스에 친구를 두고 있다.스위스는 범죄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경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비밀을 보장하는 은행제도는 나쁜 것이 아니다.스위스은행이 제공하는 철저한 보호는 나치나 공산주의 도둑들로부터 재산을 지키는데도 필요하며 은행들은 이 점에서 진정 중립과 비밀을 지켜야 한다.그러나 스위스 은행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실패했다.

슬프게도 스위스 은행가들은 스위스의 여론을 받아들이는 듯하다.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스위스인들은 스위스 은행들과 정부가 압력에 못이겨 마지못해 설치하려는 희생자구제기금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스위스은행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던 경영대학원 재학생 크리스토퍼 메일리는 폐기될 위험에 있던 유대인학살 시대의 기록을 보관해두었다는 이유로 해고됐고 그의 자녀들은 위협받았으며,경찰들도 신변보호에 냉담했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번 보고서는 스위스의 은행산업에 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은행들이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했던 고객들을 전반적으로 배신했다는 증거들은 스위스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킬 것이다.

이제 스위스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거나 심각한 법적.재정적 부담에 직면하거나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정리=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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