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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2. 91년 '유서대필사건' 당사자 강기훈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6공 최대의 시국사건이며'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도 불린 '유서대필 사건'으로 3년동안 수감됐던 姜基勳(34)씨는 지금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강서구등촌동 소재 한 CAD/CAM 시스템개발 벤처기업의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유서대필 사건'은 91년5월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던 金基卨씨가 서강대 구내 옥상에서 분신함으로써 비롯됐다.이때 金씨가 남긴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姜씨가 구속되면서 본격 공방이 시작됐다.

유서의 진위여부를 놓고 1년2개월에 걸쳐 벌인 필적 공방은 대법원의 유죄선고로 판가름이 났다. 그러나 당시 1심 재판장은 姜씨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도'판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판결이 반드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해 재판과 진실 발견 사이의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저는'강력범'으로 분류됐어요.다른 시국사건 관계자들과 따로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이 저를 더 힘들게 했어요.삶에 대한 회의도 들고 자포자기할 때도 있었지만 마약.살인등과 관계되는 다른 강력범들의 숨겨진 삶을 보면서 인간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지요.” 姜씨는 94년8월 출소한뒤 구속 직전 결혼이 예정돼 있던 이영미씨와 결혼했다.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이미'너를 위한 촛불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책을 내시기도 했어요.잃었던 우리 사회의 이성을 되찾는 일에 도움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꼭 할 생각입니다.무엇보다 6공 시절 사법부에 의해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로 지목받았던 제가 양심적으로 열심히 사는 일이 우선돼야겠죠.” 姜씨는 자신의 결백 주장에 큰 힘이 됐던 인권운동 사랑방에 들어갔다.구속되기 전에도 재야운동에 컴퓨터와 통신이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징역을 살면서도 컴퓨터 관련서적을 많이 보았던 姜씨는 인권운동 관련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일에 몰두했었다.姜씨는 가장으로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이 학원 관리직으로 취직을 했어요.보수는 좋았지만 적성에도 맞지 않고,길게 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돼 5개월만에 그만두고 지금의 직장으로 옮겼어요.수입이야 많이 줄었지요.그래도 인트라넷이라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새 기술에 대한 전망이 있고,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姜씨는 인트라넷이라는 새로운 기술 관련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일에서부터 관련 상담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강기훈'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만 뺀다면 두 아이의 아빠로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이고 소시민일 뿐이지요.하지만 언제든 또한 어떤 형태든 저의 결백을 밝혀내야 한다는 사회적 부담은 결코 줄어들지 않아요.우리 시대의 양심에 대한 부담인 셈이겠지요.감방안에서 가졌던 온갖 상념들이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제가 살아있는한 언제까지든 밝힐 것은 밝힐 생각이에요.” 고규홍 기자

<사진설명>

91년 8월'유서대필사건'1차공판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는 姜基勳씨와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로 변신한 요즈음의 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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