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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일본 빅뱅은 한국의 학습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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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보사건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에 여전히 타격을 주고 있다.특히 일본에서는 한보 스캔들과 전혀 관계없는 몇몇 기업의 신용이 크게 떨어질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한국의 국가신용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던 일류 기업들의 수표가 도쿄(東京)에서조차 한때 통용되지 않았다.너무 충격적이어서 관계자들이 쉬쉬해 왔다.한국정부와 기업의 총체적인 신용추락사태를 우리는 눈여겨 보게 된다.

일본 은행들이라고 해서 결코 신용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다.버블경기 이후 끌어안게 된 엄청난 부실채권 때문에 신용등급이 계속 떨어졌다.단기금융회사들의 사정은 더욱 말이 아니다.그런 금융기관들이 한국계 은행들의 신용불안을 이유로 더욱 높은 가산금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금융은 가장 대표적인 불황산업으로 낙인찍혔다.은행들의 경영내용은 미.유럽의 경우보다 10년이나 뒤처질 정도로 낙후성을 면치 못해 금융시스템의 대개혁(빅뱅)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있다.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총리가 내건 정치공약중 그 핵심이 빅뱅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일본 금융계에서 잇따라 벌어졌다.일본의 시중은행 가운데 하나(일본채권신용은행)가 해외 14개 지점을 일괄 폐쇄하고 국내 본점을 포함한 모든 영업점포를 매각하는 조치를 내렸다.3개 금융관련 자회사는 파산신고키로 했다.국내에서 구원의 손길로 잡아주는 동업자들도 없었다.결국은 미국의 트러스 뱅커스은행과의 자본및 영업제휴로 가까스로 재건작업에 들어가는 중이다.또다른 시중은행(홋카이도 拓殖은행)은 지방은행과 합병하면서 30여개 점포를 정리하고 2천7백여명의 행원을 감원할 방침이다.

닛산(日産)생명은 지난주 대장성으로부터 업무정지명령을 받고 문을 닫았다.전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보험회사의 도산이다.은행이나 보험사들은 거품경제가 몰고온 주가및 땅값하락과 저금리 등으로 체질이 급격히 악화돼 왔다.다음엔 어느 은행이 쓰러지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세계적 정보왕국으로 이름이 알려진 노무라 증권 이사진 15명이 퇴진하는 불상사가 역시 최근에 일어났다.총회꾼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공여한 것이 들통났다.

일본의 금융보다 훨씬 뒤처진 한국이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할 시사점이 너무 많다.

은행이건 보험 증권이건 고객의 재산과 이익에 관련된 각 기관들의 중요한 정보들이 모두 감춰져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부실채권정리.감량경영.자회사 파산형식을 빌려 드러난다.사전에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이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다.

금융기관 경영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도 확대될 조짐이다.

금융제도는 개인의 인생설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예금보험이나 보험계약자 보호기금으로도 커버할 수 없는 불신감과 신용추락이 심각하다.

98년 4월부터 실시되는 외환자유화를 계기로 가입자들의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짙다.그동안 은행이 독점해온 외환업무를 누구라도 맡아 할 수 있고,한밤중 편의점에서조차 각국 통화를 교환하거나 국내에서 기업들간에 달러 등 외환결제도 가능한 대변혁을 보게 된다.그때 일본 국민들과 기업들은 보다 신용도가 높고 이윤이 괜찮은 외국 금융기관들의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일본이 외국자본의 먹이가 된다는 업계의 우려가 매우 심각하게 들린다.

일본 개인의 금융자산은 1천2백조엔(8천4백조원).이 엄청난 액수의 5% 정도가 해외로 도피하고 나머지의 상당액수도 국내 외국계 은행창구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는 예측이다.전문가들은 이제 무슨 선택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한국은 도쿄의 금융기관들이 뉴욕이나 런던과의 시장싸움을 학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자칫하면 일본의 은행파탄에 대한 뒤처리만을 견학하고 돌아갈지 모른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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