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가격, 질서냐 경쟁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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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경원이 약과 책에 대한 현행과 같은'가격질서 유지 제도'에 대해 회의를 드러냈다.질서있는 가격이 소비자에게는 고가격에 의한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유통질서와 가격체계가 혼란에 빠지자 그 이후 우리나라는 쭉 정찰제 내지 일물일가(一物一價)에 대한 짝사랑에 빠졌다.여기에 정부의 강력한 행정적 가격통제 추구성향이 가세해 가격에 관한한 자유보다는 질서가 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가격질서 유지 방법으로는 제조업자가 유통의 단계별 가격을 제시하고 유통업자 조합은 이 가격이 업자끼리의 경쟁 때문에 일탈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조정역할을 해 왔다.그 전형적 분야가 약과 책이다.

그러나 가격파괴라는 전세계적 계절풍에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더구나 정보화에 따른 소비자의 민첩성은 어떤 성격의 가격담합이나 독점도 인정하려들지 않게 됐다.여기에 예외로 남고자 하는 어떤 기도(企圖)도 오히려 자멸을 가져온다는 것이 지금 이미 법칙화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눈에 유통업자조합은 지금까지 정부의 가격인상 자제(自制)방침을 전달하고 이행시키는 매우 효율적 장치로 인식돼 왔다.업자들에게는 경쟁억제를 통해 공급자가 정하는 유통가격을 보장하는 카르텔로 치부돼 왔다.

그러나 경쟁없는 안일의 추구는 유통업계만이 아니라 제조업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 쇠퇴를 가져왔다.누구보다 소비자를 무서워해야 한다.소비자는 가격의 질서보다 공급경로의 모든 단계에서 경쟁을 통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향상과 가격 저렴을 바란다.

비단 약과 책에 국한할 일이 아니다.다른 나라에서는 전기.수도.철도 등 이른바 자연적 독점(natural monopoly)산업분야까지 속속 경쟁을 도입하고 있다.국영기업의 민영화도 경쟁촉진 측면에서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세계적으로 최상위에 끼이는 물가상승률과 생계비수준이 우리나라 고비용구조의 근저(根底)를 이루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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