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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는다] 한 사내의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입의 가벼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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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후회남』
둥시(東西) 지음, 홍순도 옮김, 487p, 12,000원, 은행나무

나는 ‘옌스화(延時話)’라는 내공까지 연마했어. 옌스화라는 말 들어봤어? 사실 간단한 거야. 우선 어떤 일에 대해 당장 내 입장을 표시하지 않는게 기본이야. 그런 다음 몇 초 내지 몇 분을 심사숙고하는 거지. 아니 심할 때는 며칠을 심사숙고해서 모든 함정을 다 없애버린 다음에야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거야.

소설 『Mr. 후회남』의 주인공 쩡광셴의 독백이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입 때문에 어머니와 친구가 목숨을 끊고, 사랑하는 여인들까지 곁에 둘 수 없었다. 쩡광셴은 ‘옌스화’ 같이 중국에서 살아가는 ‘비법’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통제불능의 ‘주둥아리’가 문제였다.

‘금기, 우정, 충동, 충절[일편단심], 신체, 방랑, 만약[후회록]’.
중국 현대사가 잉태한 문제아 쩡광셴과 그의 가족, 친구, 여인들 사이에 흘러 넘치는 ‘욕망’의 궤적을 상징하는 단어들이자 이 소설의 장 제목들이다.

15세 소년 쩡광셴은 자본가 계급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 대가로 받은 창고에서 옛 하인 자오씨 가족과 함께 지냈다. 동물원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사상 학습을 받은 뒤 아버지와 잠자리를 10년째 거부한다. 아버지는 자오씨의 배려로 그의 딸 자오산허와 잔다. 광셴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광셴은 자오산허의 오빠이자 동네 중학교 교장인 자오완녠에게 아버지를 고발한다. 아버지는 홍위병에 의해 수 많은 비판투쟁대회에 끌려다니며 고초를 당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어머니는 호랑이 우리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광셴은 그를 짝사랑했던 샤오츠를 우물쭈물하다가 놓쳐버린다. 쉰 줄까지 동정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애처로운 ‘여성 편력’의 시작이다.
친구도 광셴의 설화(舌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머니 사후 동물원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 자오징둥의 ‘비밀’을 듣는다. 그는 자오징둥에게 비판대회에 곧 끌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자오징둥은 이 말을 듣고 자살한다.
이어 자오징둥의 사촌누나 장나오에 대한 ‘충동’을 못 이겨 그녀의 숙소에 침입했다가 강간범으로 몰린다. 강간범을 살인범 취급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그는 10년 형을 받고 실형을 산다. 수감생활 동안 ‘일편단심’ 루샤오옌의 사랑을 받는다. 그는 수감 동료의 탈옥계획을 고자질한다. 그 대가로 3년 감형을 받는다. 출소 61일을 남기고 그는 장나오의 증언으로 풀려난다. 우유부단 광셴은 루샤오옌과 장나오, 샤오츠 세 명의 여성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방랑'한다. 게다가 예전에 살던 창고 건물의 소유권을 돌려받아 막대한 돈벼락도 맞는다. 하지만 광셴에게 끝내 남은 것은 돈도 여자도 아닌 후회뿐이었다.

이 소설에는 익살과 해학으로 포장된 대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긴 뒤 남는건 씁쓸한 뒷맛뿐이다.

작가 둥시(東西)의 본명은 톈다이린(田代琳)이다. 1966년 광시(廣西)에서 태어났다. 장님 아버지와 귀머거리 아들, 벙어리 며느리의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절망을 그린 중편소설 『언어 없는 생활』로 루쉰(魯迅)문학상을 받았다. 입과 혀, 소통의 문제에 천착하는 떠오르는 작가다.

중국은 경찰국가다. 유럽에서 절대군주가 경찰권을 강화해 중상주의를 추진하던 국가들이 경찰국가였다. 경찰국가에서는 공공의 복지, 국민의 행복증진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가 국민의 모든 생활을 간섭했다. 이후 자유주의가 성장하면서 법치국가가 이를 대체해 나갔다. 최근에도 법치국가의 상대개념이나 독재정권을 가리킬 때 경찰국가라 부른다.

한 나라에서 국가 차원의 소통은 선전(체제홍보)과 소문(유언비어)으로 이뤄진다. 경찰국가일수록 소문을 두려워하고 선전을 중시한다. 하지만 소문은 막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선전은 지나치면 역효과를 부른다. 작가가 묘사한 ‘미스터 후회남’은 중국 라오바이싱의 반면교사다. 입조심, 자기검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완곡한 설득이다.

9년간 베이징 특파원을 지낸 번역자 홍순도의 맛깔스런 번역이 작가의 글맛을 잘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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