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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도>49. 채색화의 맥이은 후소회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서화미술원 재학시절인 20세에 이미 임금의 초상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어용(御用)화가 이당 김은호(1892~1979).화선이당(畵仙以堂)이라고까지 불렸던 이 천재화가는 1920년대 후반부터 서울권농동에 있는 자신의 화실 낙청헌(絡

靑軒)을 개방해 여기 몰려든 화가 지망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여기서 한국 채색화의 맥이 이어졌다.

이곳을 거쳐간 작가들은 김기창.장우성.백윤문.한유동.조중현(趙重顯).이석호(李錫鎬).조용승(趙龍承),장덕.이유태.김화경(金華慶).배정례(裵貞禮).정완섭(鄭完燮).허민(許珉).안동숙(安東淑).김한영(金漢永).김학수(金學洙)등 3백여

명.

이 문하생 가운데 일부 작가들이 모여 36년 일종의 동문회인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화 그룹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했다.엄밀히 말해 최초의 한국화 단체는 23년 이상범등이 만든 동연사(同硏社)지만 전시 한번 못한채 흐지부지 끝났고 후소회만이 이후 꾸준하게 정기 동문전을 개최했다.

후소회라는 이름은 정인보(鄭寅普)가 공자(孔子)의'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에서 붙여준 것이다.이 말은 그림 그리는 일은 흰바탕,혹은 깨끗한 정신이 있은 연후라는 뜻이다.

서울태평로 조선실업구락부에서 열린 후소회 창립전(36년)에는 백윤문.김기창.장우성.한유동.조중현.이석호.조용승.장운봉.이유태.노진식(盧辰植).정도화(鄭道和)가 참여했다.

이후 일부 작가의 교체는 있었지만 43년 6회전까지 계속됐다.이후에는 비정기적으로 전시가 이어졌다.96년에는 창립 60주년을 기념해'후소회 전망과 그 미래'를 열기도 했다.

이들 후소회 회원은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선전(鮮展)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특히 42년 열린 제21회 선전때는 입선작 60점 가운데 후소회 회원 작품이 특선을 포함해 21점이나 돼“선전 동양화부는 후소회의 독무대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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