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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를 씁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5호 03면

1. 연극배우 박정자가 후배 윤석화(극단 정美소 대표)에게

2. 2009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된 설치미술가 양혜규가 서울 아현동 이웃들에게
이미 떠나셨거나 아직 남아 계신 아현동 이웃께 드리는 새해 인사
아현동에 이사온 지도 이제 2년 반이 되었습니다. 저도 전셋값이 오르고 재개발에 따르는 철거로 새해에는 아현동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혼자만의 살림을 꾸려본 터전이었기에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더욱더 아쉽기만 합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이 동네의 진정한 일부가 된 듯했습니다. 골목 모퉁이의 자태 하나하나, 대문 위에 얹어진 빨래 건조대, 얼마 되지 않는 공간에 빼곡하게 놓인 화분, 심지어 제멋대로 빚어진 시멘트 계단 등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이 주소가 한때 여러분과 공유한 거주지였다는 것, 그 안에서 소통하고 숨 쉬고 안도했다는 것을 고하며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3. 뮤지컬 배우 정성화가 이강재 고교 은사에게

4.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시인)이 아들에게
아들아
서른 넘도록 딱히 할 일이 없는 너의 세상에
또 한 해가 밀려오는구나.
쓰나미 높은 마루를 겁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사람처럼
숨이 헉 막히는 새해.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절이므로
네가 더 겨워할까 봐 말도 못하고,
네가 나간 방에서 빈 소주병과 꽁초 수북한 재떨이만
들고 나오는 니 에미는 혼자 화장실 들어가서
한참을 나오질 않는다.
도무지 進度가 안 나가는 너의 생을
가슴에 뭐가 꽁 얹힌 것처럼
우리가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끙끙 앓는 것은
그래도 언젠가 너 스스로 바닥을 치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거였는데, 이제는 이 침묵마저
너에게는 부담이겠지.
오늘도 네가 세상에 나가
거리의 수많은 간판들을 보며
어디 네가 들어갈 틈이 없는,
등 돌려 외면받는 그 심정, 나는 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구 한 사람이 울고 있을 때
그 흐느끼는 어깨 곁에 네가 간다면
거기에, 네가 할 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아까운 이 생이 헛바퀴 도는 일은 없지 않을까?

5. 가수 호란이 독일 베를린 동물원의 북극곰 크누트에게

6.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가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 전영자(이외수씨 부인)에게

7. 만화가 허영만이 선배 만화가 이향원에게
향원 형께
형, 우리가 만난 지 벌써 43년입니다.
까까머리 겨우 면하고 문하생으로 형의 자취방에서 연탄불을 갈아가며 만화에 매진했었지요.
우리 만화가 불량으로 몰려 매년 남산에서 화형식을 당하는 수모를 받으면서도 수북이 쌓이던 펜촉을 보며 청춘을 내던지던 그때를 돌아봅니다.
화려한 세상 졸업장은 없었지만 형이 준 졸업장, 형이 준 박사학위,
지금도 고맙습니다.
그때 형의 배려와 격려는 영원한 나의 에너지였습니다.
이제는 잘 차린 밥상을 앞에 놓고 있는데 속수무책으로 육신이 정지되어 그만 형은 쓰러졌습니다.
4년여를 부자유스러운 몸 추스르며 형이 흘린 눈물을 방울방울 기억 못 하는 나를 용서해 주세요.
형, 있잖아요. 우리의 일본 친구 사카이다니상, 우리 이름을 한글로 쓴 문패를 자기 집에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마당의 채마밭에는 가지랑 오이·고추·상추가 크고 있고 화들짝 피어오른 나리꽃…
형, 지금처럼 열심히 운동해서 오작동 육신이래도 꼭 한 번 같이 갑시다.
발가벗고 함께 온천하며 별이라도 헤어봅시다.
형을 늘 기억하는 사카이다니상은 전자수첩을 꺼내들고 더듬거리는 형의 일본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일어나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며칠 전 통화 때 내게 하신 말
‘올해는 자신 있어!’
제발 올해는 형의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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