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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칼럼>지도자의 마음공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판화가 이철수씨로부터 시원한 말을 들었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도둑질이 만연한 세상으로 보면서도 그들에 대한 직설적인 손가락질은 달가워하지 않는다.세상에 만연해 있는 모순들이 이미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탐욕의 질서를 뒤엎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금에 일어난 큰 사건으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어 지금 그 원인과 진위(眞僞)를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이 일로부터 단순한 제재 이상의 대안과 교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전도가 크게 위태로울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일시적 비난은 쉬운 일이다.사체(事體)를 올바로 세우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재발을 방지하는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자기를 되돌아 보고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아니하며(無欺心) 사람들을 속이지 아니하고(無欺人) 하늘,즉

진리를 속이지 아니하는(無欺天) 인물이 되도록 스스로 결심하는 것은 가장 귀한 일이며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제도.환경.권리라도 악용해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유능하되 구세(救世)의 도덕과 철학을 가진 인물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다.이런 도덕은 결코 일시적인 시혜(施惠)에 그치거나 자신을 누르고 홀로 서 있는 연약한 도덕이 아니다.그것은 결국 무엇이 참으로 이득이 되는가,무엇이 참된 명

예인가,무엇이 참된 나인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작은 나에서 큰 나로 확대된 대아(大我)의 삶 자체다.마당을 쓸더라도 자기집 마당을 쓸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 다를 것이다

.대아의 도와 경륜으로 사는 사람은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는 곧 천지의 일을 대행하는 사람이지만 작은 욕심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리 큰 일을 하더라도 작은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대아의 삶을 지향하는 지도자가 많이 배출돼 선비정신의 전통이 더욱 크게 진작돼야 한다.옛 사람들은 학문을 하더라도 심신(心身)을 바루고 자기완성을 위해 했고,세상에 나아가더라도 선정덕치(善政德治)를 베풀고 제

생의세(濟生醫世)의 경륜을 편다는 목적이 뚜렷했다.

우리들은 세상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관심이 밖으로는 기(技)와 술(術)로

흐르고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단련하는 일엔 적은 것같다.밖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은 있어도 안으로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이 거의 없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많은 지도자일수록 자기를 바르게,크게 변화시키려는

숨은 공부가 필요하다.예나 지금이나 민심은 결국 사심(私心)이 없고 큰 덕을

갖춘 지도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원불교 2대 종법사를 지낸 정산 송규종사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다음의 네가지를 제시하고 있다.첫째는 법규에 탈선됨이 없고 친소(親疎)에

편착함이 없이 공평 정직하게 처사함이오,둘째는 소아(小我)를 놓고 전체를

살피며 근(近)에 얽매이지 않고 원(遠)을 관찰해 대국적으로 처사함이오,셋째는 인정과 의리에 바탕해 화기롭고 유여하게 처사함이오,넷째는 회계가 분명하고 시종(始終)이 한결같이 명백하게 처사하는 것이다.

이런 지도자는 천지의 제재를 받기 전에 사람의 제재를 먼저 받고, 사람의

제재를 받기 전에 자기양심의 제재를 받게 된다.일을 당하기전에 양심에

비추어 미리미리 예방하기 때문에 항상 당당하고 떳떳하다.또 이런 지도자는

스스로 스승을 모실 줄 안다.옛날에는 국사(國師)를 모셨거니와 구체적인 대상이 없더라도 모시려는 그 정신과 태도에서 이미 뭇 사람들의 감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요사이 가는 곳마다 진달래(眞達來)가 만발이다.이 나라에 거짓이 가고 참에

이르는 나라가 초래한다는 징조로 받아들이고 싶다.우리 모두 마음으로부터

먼저 화사한 진달래를 피워보자. 藏山 황직평〈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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