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에서 내면으로 회귀 - 고은.송기원씨 최근작 철학적.종교적 문제 탐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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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은(高銀.64)씨가 신작시집'어느 기념비'(민음사刊)를 펴냈다.“지나간 날들의 군림조차/한갖 티끌인 오늘/드넓은 초원 전체에서 일어나는/어느 일도/아랑곳하지 않은 채/오직 먼데 바라보고 있다”며 高씨는 시'사자'를 통해 이제 오늘에 조급하지 않고 '먼데 바라보고 있다'는 시적 자세를 내비치고 있다.그런가하면 송기원(50)씨는“평생을 저자거리의 더러운 진흙탕에 파묻혀 살아온 나로선 가히 파천황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고 장편소설'청산(靑山)'(창작과비평사刊

)을 펴내며 도(道)를 찾아 청산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바람부는 서울에서 광주에서/부산에서/한반도 휴전선 언저리에서/이 몸뚱어리 한 개로/하염없는 즉흥 참여시를 노래하였습니다/때로는/느닷없는 폭풍우의 밤바다 파도자락이 되고자/땅 위의 피 어린 우연에 떨어지는 벼락이 되고자

하였습니다/때로는/한 방울의 눈물도 되지 못하면서/벗들과 함께/눈물의 거리에 서 있었습니다.”'참여시'앞부분에서 진솔하게 적고 있듯 1958년'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高씨는 1백20여권의 시집.소설집.평론집.산문집등을 펴내며 온

몸 부서지는 행동과 작품으로 시대의 한복판에 서왔다.분단과 독재를 타파하기 위해 시는'폭풍우''벼락'이 돼야 한다며 끊임없이 참여시,그 선동의 시를 써왔다.그런 高씨가 이번 시집에서는 참여시의 토양과 그 정신적 뿌리가 됐던 사심없는,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도 돌보고 있다.

“돌아왔다/쓰레기/꽃처럼 피어 있는 곳/여기가 그렇게도 그리웠던 세상//돌아왔다/증오가 덕지덕지/똥처럼 말라붙은 곳/여기가 그렇게도 그리웠던 세상/흐린 하늘에 대고/침 뱉아 저주하는 곳/양아치들이/깡패들이/득실거리며/밤새 소리치는

곳//돌아왔다/녹색 무청같은 어설픈 몸 팔아/계집들은 깔깔대고/우뚝 선 깃대에/깃발도 휘날릴 줄 모르는 곳/여기가 그렇게도 그리웠던 세상.”

'귀향'전문이다.그렇게도 그리워 다시 돌아온 세상에는'쓰레기''증오''양아치''깡패''창녀'들만이 득실거리고 있다.회한(悔恨)인가,깃대는 우뚝하나 깃발은 휘날릴 줄도 모르고.그러나 이 곳이 시인이 다시 몸바쳐야 할 세상 아니던가.썩

은 물에서 연꽃이 피어오르듯 高씨는 이제 찬란한 연꽃이 아니라 그 썩은 물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인간 세상에 대한 그런 따스한 눈길을 지켜내야 '새로운 시절 참여시의 커다란 의미가 치솟는 북소리'('참여시'중)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지난 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宋씨도 70,80년대 내로라하던 참여문학진영의 젊은 행동파 기수.'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인도로 간 예수'등 소설집과'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마음 속 붉은 꽃잎'등 시집을 펴내며 뒷골목 사람들과 여자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세상 껴안기를 하던 宋씨가 90년대들어 국선도에'입문'하더니 마침내'현대의 신선'으로 일컬어지는 청산거사 수련기를 소설화한'청산'을 펴냈다.

이 작품은 학생운동을 거쳐 교육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교사 유시백이 도를 찾아 계룡산에서 3년간 움막생활을 하다 봉두난발의 청산을 만나 그의 수련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불평등한 인간 관계에서 오는 모든 춥고 쓸쓸한 세계에 대하여,그 해결방법으로 유물론을 신봉하게 되었다.…해방 신학에는 바로 물리적인 계급모순에서 오는 춥고 쓸쓸한 세계뿐만이 아니라 죽음 같은 춥고 쓸쓸한 세계를 벗어나는 또 다른 인간해방의 길이 있었다.나는 해방신학에서 신보다는 인간의 해방을,그리고 보다 폭넓은 인간해방으로서의 사후세계나 초월계를 배운 것이었다.”

작중 유시백의 생각이다.그리고'폭넓은 인간해방으로서의 사후 세계나 초월계'가 송씨가 이 구도소설을 펴내게 된 까닭이다.高씨는 깃대에서 내려와 이제 참여문학의 토양,그 시정(市井)속에서,宋씨는 몸담던 시정을 떠나 청산 속에서 어려운 시대,시공을 초월해야 하는 참여문학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역사와 시대 흐름의 한복판보다 이제 시정(市井)속에서,혹은 청산 속에서 민중 구원을 위한 새로운 참여문학 세계를 일군 신작을 펴낸 고은.송기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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