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서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대사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가 서복(徐福)의 행적이다. 서복은 불로초를 구해 오라는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30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이끌고 바다 건너 동쪽으로 떠난 인물이다. 하지만 구체적 행선지는 분명치 않다. 『사기』에는 삼신산(三神山)을 향해 간 서복이 평야와 드넓은 습지(平原廣澤)가 있는 곳에 정착했다는 기록만 나온다.

한국에서는 서복이 제주도에 온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서귀포 정방폭포 절벽에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徐市過此)”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이 그 근거다. 서불(徐市)은 서복의 다른 이름이다. 서귀포(西歸浦)란 지명도 서복이 정방폭포까지 왔다가 서쪽으로 돌아간 데서 유래한 것이란 주장도 있다. 제주도 당국은 이곳에 2003년 서복전시관을 세우고 서복공원을 조성했다.

일본의 와카야마현에는 아예 서복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서복이 ‘덴다이우야쿠’란 약용식물을 발견하고 정착해 살다 죽었다는 전설이 이 지역에 전해져 온다. 이 식물은 1978년과 82년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와 자오쯔양 총리에게 선물로 증정됐다. 진시황에게 전달하지 못한 불로초를 2000년이 지난 뒤에야 전한다는 설명과 함께.

서복의 행선지는 분명치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과 일본의 지방 곳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서복 전설이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와 전파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서복 일행에는 각 분야의 기술자(百工)들이 포함돼 있었고, 오곡 씨앗을 휴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복을 한·중 교류의 원점으로 보는 시각이나 일본에 도작(稻作)문화를 전한 주인공으로 보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지난주 서귀포 서복공원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친필 휘호 현판 제막식이 있었다. 원 총리의 휘호를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13일 후쿠오카에서 출범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한국에서 개최할 차례가 되면 서귀포가 회담장으로 안성맞춤이겠다. 서복을 매개로 세 나라 간의 면면한 교류의 역사를 되새기며 회담에 임한다면 오늘날의 사소한 갈등쯤이야 금세 풀리지 않겠는가. 서복이 찾아 헤매던 불로초를 대신해 제주도 산록에서 재배한 설록차를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