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것은 이야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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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집 고쳐가며 벗들과 함께 사는 여행생활자
멀리 친구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내 집에서 몇 달 머물다 가겠단다. 지금은 방이 한 칸뿐인데 옆에 붙은 창고의 바닥과 벽을 뚝딱 수리해 둘 다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방 두 칸으로 고친다면 어떨까. 원시부족사회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 『여행생활자』라는 책을 내고 동명의 직함을 달게 된 유성용(37)씨의 집이라면 그럴 수 있다.

유씨는 수년 전부터 북한산·지리산 자락 등을 다니며 기울어져 가는 헌 집을 고쳐 사는 일을 기쁨으로 여겨왔다. “여행을 다닐 때도 늘 헌 집을 보러 다녔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집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여행을 그렇게 즐기는 편도, 많이 다닌 편도 아니고요. 다만 생활에 대한 관심에서 여행을, 여행과의 긴장선 속에서 생활을 사유한 거죠.”

아무리 오래됐어도 전문가 아니면 손댈 수 없고 획일화·규격화된 집은 유씨가 말하는 ‘헌 집’이 아니다. 그는 오랜 시간을 두고 손수 고쳐 가면서 사는 소박한 시골집을 좋아한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성북동 산동네 판잣집도 수개월에 걸쳐 무너진 담을 세우고 뚫린 지붕을 고치고 산뜻한 창문을 새로 내고 반질반질하게 윤 나는 툇마루도 만들어 끝내주는 도심 야경을 내려다보는 집으로 수리해 냈다.

익숙지 않은 노동에 얼마나 고생할지가 눈에 보이지만 맘에 드는 헌 집을 발견하면 들어가 살고 싶어 못 견딘단다. 물론 주변 도움도 받고 어느 정도 배워야 하지만, 나머지 집수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일을 하느니 다른 일로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안 하는 거죠. 저는 어차피 누구나 한 사람 몫의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는 해야 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가족·연애·우정·일… 전문가로 살다 보면 한군데 매진하면서 나머지는 교환가치로 거래해 버리죠. 매사에 비전문가로 사는 것, 가냘프고 경쟁력 없는 삶의 방식도 나름 괜찮습니다.”

유씨의 집에는 보통 여러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가족은 아니다. 여행객이 더부살이를 하거나, 자기 집이 시내에 있으면서도 심심하다든지 하는 이유로 머물러 있는 이들이다. 다들 적당히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한다. 어릴 때부터 내 방을 배정받는 ‘표준형 주택’ 문화와는 너무 다르다. “답답하고 따분한 ‘나’에 대한 자문자답에서 벗어나 나의 바깥을 구경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여행생활자로 사는 이유도 헌 집을 고치는 이유도 그런 면에서 통하죠.”

헌 집을 수리해 사는 것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사람의 사연에 나의 상상력을 보태는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예전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며, 거기 몸을 맞추려다 포기한 실패담이며 듣노라 앉은 방문객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 해가 지는지도 몰랐다. 어느덧 바로 옆의 서울 성곽을 반짝이며 불이 들어왔다. 내년에 또 경남 함양에 좋은 헌 집 얘기를 듣고 간 보러 내려간단다. 그동안의 헌 집들을 부여잡고 씨름한 흔적은 최근 책『생활여행자』에 일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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