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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중독, 술을 줄입시다 ④<끝> 술 끊은 지 7년5개월, 이현재씨의 어제와 오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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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15면

보건복지가족부의 ‘2008년 건전음주를 위한 대학생 포스터 공모전’ 입상작.

일회용 주사기와 식품가공기계 제조업체에서 공장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현재(51·사진)씨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술을 무척 즐기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장난 삼아 첫 잔을 들이켠 것이 술의 시작이었다. 사회에 나와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마시는 술의 양이 조금씩 늘었다. 그러다가 남성 네 명 중 한 명은 평생 한 번쯤 겪게 되는 알코올 사용장애(국립서울병원 정신질환 실태조사, 2001년)를 갖게 됐다.

일터도 가정도 내 몸도 이젠 ‘환한 미소’

지금 이씨는 ‘별종’에 속한다. 그렇게 먹던 술을 딱 끊은 것이다. 이씨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지 7년 하고도 5개월이 됐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또 그 변화는 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크리스마스인 25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포도마을의 아담한 아파트를 찾아가 이씨와 그의 부인 장서연(50)씨로부터 그의 단주기를 들어봤다.

-언제부터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나.
“알코올 중독은 유전적 요인이 있다는데, 아버지처럼 나도 술이 잘 받는 체질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농촌에서 ‘영농 후계자 1기’로 축산업을 하다가 1980년대 중반 ‘소 파동’ 때 망해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술이 늘었다. 좌절감도 컸지만 ‘촌놈’이 구로공단 앞 가리봉동 유흥업소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냥 지나치질 못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온통 술을 마시게 유혹하는 환경이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심했나.
“밖에서 술을 마실 때도 많았지만, 잦은 술자리 실수 때문에 불안해지면서 그냥 집에 들어올 때마다 소주 한 병씩 사다 마시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주말이면 외출도 안 하고 7~8병씩 마시기도 했다. 점점 몸이 견디기 어려워지기에 내과를 다니며 치료도 받아 봤지만, 대개는 ‘해장 술’로 속을 달랬다.”

-술을 끊게 된 동기는.
“직장에서 일 잘하고 책임감 있다고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는데, 술이 ‘공든 탑’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평소에 아무리 일을 잘해도 술만 마시면 동료들과 싸우고 공장 구석에 누워 자는 걸 어느 직장 상사나 동료가 좋아하겠나. 나 스스로도 술 마신 뒤엔 손이 자꾸 덜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흐르면서 구역질을 하는 등, 몸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와의 사이도 당연히 나빠졌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내 손을 잡아 끌고 성가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로 데리고 갔다.”

-어떤 프로그램이었나.
“2001년 7월 9일부터 9월 15일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매일 센터로 출퇴근을 했다. 아침에 가면 국민체조부터 시키기에 처음엔 이런 걸 왜 하나 싶었다. 계속 하다 보니 술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몸이 풀리는 걸 느꼈다. 명상 시간도 있었고, 술 마실 때의 버릇 등에 대해 다른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림을 통해 내 안에 잠재된 다른 불만이나 문제는 없는지 표현하게도 했다. 매일 받은 교육에 대한 생각을 적어 발표도 했다. 내과와 정신과 치료도 병행했다.”

-힘들었던 점은.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각오를 단단히 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생산부장이었는데, 사장님께 ‘아무래도 병인 것 같다. 이번 기회에 꼭 치료했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더니 의외로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두 달간 본봉의 50%씩 월급도 주셨다. 치료센터의 수녀님들과 함께 가장 고마운 분이다.”

-술을 끊기 전후를 비교한다면.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전에는 술에서 깨면 실수한 게 없나 겁이 났다. 누가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귀띔해 주면 불안·초조감이 엄습해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이 대목에서 이씨는 옛 생각이 나는지 눈물을 보였다). 이젠 부끄러워할 일이 전혀 없으니 매사에 자신감이 생긴다. 간 건강수치도 아주 좋아졌다. 옛날에 한창 자라던 아이들에게 술 취해 널브러져 자는 아버지의 모습만 보였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술을 안 마셔서 불편한 점은.
“직원들이 회식 뒤 2차로 노래방 같은 곳을 가고 싶어 하는데, 공장장인 내가 술을 안 마시니까 얘기를 잘 못 꺼내는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술기운 없이 노래방을 가 봐야 별로 흥이 나지 않는다. 그 외에는 특별히 불편할 것 없다. 사회생활 때문에 술을 꼭 마셔야 하는 경우는 사실 1년에 기껏해야 몇 번 안 된다. 나머지는 핑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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