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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숨은 보물, 칠기공예의 매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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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12면

1,1-A 척채팔괘용문합 명대의 것으로 옆면에는 용을, 윗면에는 학과 꽃·팔괘의 문양을 새겼다. 특히 도교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팔괘 문양은 베이징 고궁박물관에도 없는 독특한 것으로 희소성이 높다2, 2-A 척홍누각인물문팔각합 청나라 건륭 시대의 것으로 척홍 기법으로 만들었다. 지름이 50.8㎝로 당시 이 정도 크기의 칠기를 만들려면 공이 많이 들어가므로 전해지는 작품 수도 적다3, 3-A 주칠묘금연판형칠렴 명대의 것으로 금으로 칠한 화려한 기법이 눈에 띠며 칠기가 회화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예다4, 4-A 흑칠나전누각인물문합 시대를 구분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원나라 때의 것으로 이 시기 칠기는 가장 화려하고 세밀해지며 정교해진다. 원 이후 중국 칠기는 점차 단순해진다. 한국 칠기의 고려 때 작품을 연구할 때도 도움이 되는 주요 자료다.5 척흑화문탁잔 전형적 원대의 기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6 흑칠나전화조도반 복숭아나무에서 쉬고 있는 새를 그린 나전칠기와 다리의 생김이 유려하다 7 흑칠나전누각인물문탁자 높이 38.5㎝. 명대의 것으로 시대와 장인의 이름이 작품 한쪽에 적혀 있다

지난 3일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발표됐다. 리 컬렉션(LEE씨 집안이 소장한 작품들)이 출품한 중국의 송·원·명·청대를 대표하는 칠기 32점이 모두 고가에 낙찰되면서 국제적 화제를 모은 것이다. 최고 낙찰가(374만1000달러·약 60억원)를 받은 작품은 지름 17.5㎝의 ‘명영락 건륭어제척홍조쌍봉연화잔탁’. 명대에 도자기 찻잔을 받치던 것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문양은 물론 건륭 황제가 직접 칠기 안에 금으로 글씨를 새겨 넣은 것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았다. 둘째 낙찰가(258만 달러·약 40억원)를 받은 작품은 ‘명홍무 척홍요지축수도릉화식반’이다.

전윤수 중국문화연구소 대표·북촌미술관 관장

11월 27일부터 12월 3일 경매 당일까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중국미술연구소 전윤수 대표는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 모두 아시아의 칠기공예 작품이 이렇게 주목받은 적은 없었다. 유럽과 미국·중국의 딜러들이 각축하면서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고 행사장 분위기를 전했다. “그동안 칠기는 도자기나 여타 유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각되지 않았던 분야죠. 이번 경매를 통해 아시아의 중요 미술품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지난해 8월 자신이 운영하는 북촌미술관에서 ‘중국 칠기의 미’ 전시를 열고 도록까지 출간했던 전윤수 대표로서는 이렇게 세계 미술시장에서 칠기공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 반갑고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사실에 뿌듯하다.

칠기공예는 종합예술품이다
칠기(漆器)공예는 아시아, 그중에서도 중·한·일 3개국에서 발원하고 꽃피워 온 독특한 예술분야다. 우리 선조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의 칠액을 이용해 기물을 도장하면서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함께 추구해 왔으며, 이는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하고 발전시킨 문화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저장성 하모도유지에서 7000년 전의 주칠로 된 목기가 출토돼 사용 연대가 청동기나 도기보다 오래된 것으로 판명 났으며, 출토된 주칠 목기의 보존 상태 또한 좋아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옻칠의 견고함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 주는 좋은 예다.

칠기, 다시 말해 옻칠예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유백색 옻액을 정제해 만들어진 ‘주칠’과 철(Fe) 성분을 첨가해 화학 변화를 일으킨 짙은 검은색의 ‘흑칠’로 주로 제작된다. 참고로 천연 옻칠을 한국에서는 옻칠, 중국에서는 국칠·대칠·생칠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우루시라고 부른다. 물체 표면에 옻칠을 하면 건조된 후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보호막이 형성된다. 이 막은 광택이 풍부하며 우수한 내마성·내수성·내부식성·절연성·내산성을 갖게 돼 고농도 염산·유산과 20% 이하 농도의 초산에도 부식되거나 썩지 않는다. 덕분에 제기, 악기, 가구, 연회용 기물, 화장구류 등 일상용품에 많이 쓰였으며 건축과 장례 절차에도 빈번히 사용되었다. 하지만 칠기를 사용할 수 있는 층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칠기는 도장하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조각을 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노동력 또한 적잖이 든다. 따라서 칠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계층은 일반 서민보다 황실이나 귀족 등의 권력층이었다.

“중국의 옛 기록에는 ‘칠기 잔 하나가 청동기 잔 열 개와 비견된다’는 표현이 있죠. 그만큼 칠기의 문화적 비중은 도자기나 청동기와는 다른 계급적 우위를 점한 중요한 동양의 미술품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옻칠연구소 소장 이종헌씨의 설명이다. “옻칠에는 실용성뿐 아니라 탁월한 미적 감각이 있죠. 수축이 자유로워 본래 소재와의 결합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고상하고 풍부한 광택을 가지고 있어 각종 예술품 제작에 적합해요. 또한 다양한 색상 등의 독창적 표현이 자유롭습니다.”

8, 8-A 명홍무 척홍요지축수도릉화식반 지난 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둘째로 높은 낙찰가(258만 달러·약 40억원)를 받았다

칠기는 크게 조각이 위주인 ‘조칠’과 조개 껍데기를 여러 가지 문양으로 가공하여 부착한 ‘나전칠기’로 구분된다. 조칠은 다시 척홍·척흑·척서·척채 등의 기법으로 나뉜다. 반투명한 옻칠에 주사라는 광물질안료를 조합해 만들어진 주칠을 적게는 수십 차례에서 백여 차례 도장을 하고 조각을 하게 되는 기법을 ‘척홍’이라고 부른다. 즉, 척홍은 두껍게 도장된 주칠 층을 조각한 칠기다. 주칠과 몇 가지 채색칠이 중첩돼 있는 것을 ‘척채’, 주칠이나 흑칠을 반복해 도장하고 구름 문양을 조각한 것을 ‘척서’라 한다. 그 외에도 송·원대 도자기와 맥을 같이하는 ‘단색칠기’들이 있다.

한.중.일 칠기 문화 비교
중국 칠기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 칠기들의 주된 문양은 화조·구름·누각·산수·인물·용봉 등이다. 이는 시대마다 유행에 따른 차이를 보이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칠기공예의 예술적 가치가 빛난다. 칠기는 그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매 시기 최고의 권력층이 가장 뛰어난 장인들의 손을 빌려 당대 최고의 기술과 예술적 역량을 집약시킨 종합예술품이다. 한 점의 칠기물이 제작되기까지 과정을 보면 ‘칠’ 이외에도 수많은 공정과 기법이 구사된다. 즉, 칠기 작품 하나에는 공예·조각·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있다. 이것은 고대미술사적 자료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시대마다 유행했던 문양을 통해 당시의 철학과 사상을 유추할 수 있고, 인물화를 통해 복식사와 초상화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으며, 조각과 회화의 전개 기법을 통해 당시 화풍과 재료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기술 발전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칠이 무엇인지, 어떤 매력과 가치를 지녔는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져 온 칠기 유물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칠기의 우수성과 더불어 문화예술사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면 우리 문화가 훨씬 풍부하고 탄탄해질 수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개인 소장품으로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 ‘위대한 얼굴-한·중·일 초상화 대전’ 을 기획총괄하고 도록까지 펴냈던 전윤수 대표가 4년 전부터 칠기공예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칠기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 보자,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도록을 만들게 되면 학계와 대중의 관심도 집중되겠지, 이게 제 계획이고 바람입니다.” 중국과 일본을 부지런히 오가며 개인 소장가와 국립·사립박물관 칠기 담당자들을 만나 도록 제작 협조 교섭을 이뤄냈고, 직접 컬렉션을 사들이기도 했다.

이 모든 노력과 열정이 모인 결과물이 올 연말 출판되는 학술도록 『중국·한국·일본의 칠기공예-아시아의 빛 MASTERPIECES OF EAST ASIAN LACQUERS(고흐 출판사)』이다. 중국 칠기 100여 점, 한국과 일본의 칠기 각 50여 점이 사진, 시대·도판 해설과 함께 소개돼 있다. 또한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관 고기물부 주임연구원 장룽을 비롯해 중·한·일 칠기공예의 역사를 한눈에 아우를 수 있는 전문가들의 논고도 실었다.

“우리 칠기문화의 우수성과 자부심은 인정하지만, 문화란 결국 주변국들의 교류를 통해 함께 발전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만의 독창성은 다른 나라와 무엇이 같고 다른지 비교하면서 더 확실해질 수 있죠. 그래서 아시아에서 칠기공예가 가장 발달한 3국, 그중에서도 중국의 것을 기본으로 하나의 책 속에서 비교·정리해 보려 한 겁니다. 영문·중문 번역을 함께 실은 이유도 그것이고요.”

국내에서는 아직 낯설고 멀기만 한 칠기공예. 당연히 연구 자료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중국·한국·일본의 칠기공예-아시아의 빛』이 ‘기록문화의 힘’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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