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 이상범展, 화폭에 쏟아부은 선친의 열정 - 이건걸 상명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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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일생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오직 작품에만 매달려온 작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지난달 13일 시작해 오는 20일까지 호암갤러리에서 계속되고 있는'한국 산수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전'을 맞아 청전의 작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교감했던 그의 아들 이건걸(상명대.한국화가)교수의 글을 통해 청전의 세계로 들어가본다. [편집자]

어느 분야이건 자기가 택한 일에 늘 충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선친 청전만큼 그림 그리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친은 어느 작가보다도 다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는데는 어려운 일도,괴로움도 많았을 것이다.그러나 선친에게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곧 일상생활이었다.물론 전란중에도 소품은 계속 제작했고 노년에도 대작을

연이어 계속하셨다.그러나 생전에는 개인전 한번 변변히 하지 못하셨다.아직 개인전을 열기에는 실력이 모자란다는 생각과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나마 한번의 개인전은 6.25중 피난지였던 대구에서 여러 벗들이 발기인이 돼 추

진해준 소품전이었다.그러나 그 전시는 여러 화가들이 전란중에도 흔들림없이 작품제작에 힘쓰자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어서 개인전이라 여기지 않으셨다.

어느 삼복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시며 작품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면 작품을 하시지요”라고 여쭈었더니“덥다고 쉬고,춥다고 쉬고 언제 작품을 하는가”라고 하시니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또 어느날은 꽤 큰 작품을 그리려 화폭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보고 '저 그림을 그리려면 먹도 많이 필요하겠지'하는 생각에“먹을 얼마나 갈아드릴까요”하고 여쭈었더니“내 그림은 내가 알맞게 먹을 갈아 쓸테니 너는 네 할일이나 하거라”

하시어 더 할말없이 돌아섰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집앞 골목에서 소쿠리 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그 소쿠리 파는 50대의 시골여인을 부르셨다.그러고는 정작 소쿠리는 사지 않고 화실로 데려가 그림을 보여주고“이 그림이 아침이여,저녁이여? 또 계절은 어

느때 같소”라고 물은뒤 그 여인의 답을 듣고는 고맙다고 하며 소쿠리를 하나 사주시는 것이 아닌가.나는 매우 의아해 그 여인이 무엇을 안다고 그림을 보아달라고 하셨느냐 여쭈었더니“그림이 기운생동(氣韻生動)하여 남녀노소.유무식.동서양

따로 없이 공감을 하면 되는 것이야”라고 하셨다.

이제 선친이 탄생한지 1백돌을 맞아 비로소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이번 전시회를 통해 76해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거의 평생을 바쳐 제작하신 역작들에 내재된 그분의 의지와 노력이 한국화단을 이끌어갈 많은 젊은 작가들

에게 큰 힘이 되길 바란다. 이건걸〈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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