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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조성민’을 위한 변명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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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복했던 프로야구 선수 시절
“신일고 시절엔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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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이 1998년 5월 야쿠르트전에서 완봉승을 하고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월간중앙 “조성민은 실력과 외모를 모두 갖춘 최고의 야구선수였다.”

“그가 던진 공은 마치 살아 있는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허공을 날아갔다.”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을 기억하는 팬들의 말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파경, 이혼한 아내의 충격적 자살, 친권논란으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그에게도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야구 선수로 마운드에 서 있을 때였다. 그는 일본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였다.

1990년대 초반 신일고 야구부에 있던 그는 임선동(휘문고)·손경수(경기고)와 함께 고교 투수 ‘빅3’로 꼽혔다. 타자로는 광주일고 박재홍이 있었다. 투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변화구를 던질 때도 공을 자유자재로 부릴 정도로 조성민의 제구력은 뛰어났다. “그때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었다. 그때가 가장 제구력이 좋았다. 누구든 내 볼을 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07년 <스포츠 2.0> 인터뷰에서)

그는 착실한 모범선수였다. 집과 학교, 야구밖에 몰랐다. 남들이 여학생을 만나고 몰래 담배를 피울 때 그는 오로지 야구만 했다. 팀 연습이 끝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후 9시까지 불을 켜놓고 자발적으로 운동했다. 1991년 봉황기대회 결승에서 선린상고를 12-1로 꺾고 우승했고,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전에서는 광주일고에 14-2로 크게 이겼다.

1991년 두 경기에서 딴 2관왕은 그가 지금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기다. 그를 좋아한 것은 야구 팬뿐만이 아니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게다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실력까지 갖춘 그는 당시의 10대들로부터 지금의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완벽한 하드웨어를 갖춘 야구선수였다.

그때 조성민은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찬호의 가장 큰 라이벌이기도 했다. 청소년대표 시절 박찬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잘 곳이 없어 그의 집에 이틀을 머무르면서 둘은 친구가 됐다. 박찬호가 1996년 발행한 자서전 에는 조성민에게 전화를 걸어 운동 여부를 틈틈이 확인했다는 대목이 써 있다.

조성민이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유치원 시절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플라스틱 방망이와 공을 선물했다. 발판을 밟으면 공이 공중으로 튀어올라 때릴 수 있게 만든 장난감이었다. 용마초등학교 1학년 때는 야구만 하고 놀았다. 4학년 때 둔촌초등학교로 전학 가 야구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했다.

1980년대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10명을 뽑는 야구부 모집에 여학생 2명을 포함해 100명이 몰렸다. 당시 체육부장이 키가 큰 그를 보고 “꼭 야구부에 오라”고 했다.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뛰다 6학년 때 투수를 맡았다. 그의 어릴 적 우상은 투수 박철순(전 OB)과 김시진(우리 히어로즈 감독), 타자 김봉연(전 해태)·이만수(SK수석코치) 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팔꿈치가 아팠다. 친구들과 비치볼로 배구를 했는데 무리하게 팔을 쓰다 뼛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때부터 침을 맞았다. 고려대 시절 구속은 빨라졌는데 허리수술을 받아 제구력과 변화구가 나빠졌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스카우트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에서 뛰었지만 그의 원래 꿈은 메이저리그 진출이었다.

1994년 대학 3학년 때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Toronto Blue Jays) 팀에서 그의 집으로 스파이크와 티셔츠를 보내주는 것을 받았을 때부터 미국 진출을 꿈꿨다. 일본행을 결심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미국에 가면 찬호 다음이지만 일본은 네가 처음”이라며 조성민을 설득했다. 1995년 요미우리와 계약한 뒤 1년 반 동안 2군생활을 했다.

1998년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무리투수일 때는 시속 153km까지 나왔다. 선발로 뛰던 1998년에는 시속 146~147km의 공을 던졌다. 한 경기에 많으면 130개 이상, 조금 던져도 110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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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은 뛰어난 외모에 실력까지 갖춘 상품성 최고의 프로야구 선수였다.

부상당한 몸으로 돌아온 고국에서의 냉대로 마음고생

1998년에도 한 경기를 빼고는 이긴 경기에서 거의 완투했다. 일본에서 화려한 전적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제구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자신이 출전한 야구 중계를 보면서 “공 끝이 너무 좋아 공이 살아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시절이었다. 조성민은 테마곡으로 일부러 <애국가>를 골랐다.

그가 도쿄돔에 등장하면 “피처 조성민”이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야구는 그의 인생의 전부이자 미래였다. 불운이 찾아온 것은 1998년 7월 일본 올스타전 때였다. 고질병으로 앓던 오른쪽 팔꿈치가 말썽을 일으켜 시즌을 마감했다. 팔꿈치 부상 후 두 번의 수술과 재활을 거쳤지만 일본에서의 재기는 불가능했다.

요리우리에서의 화려한 시절은 2002년 10월로 막을 내렸다. 국내 어느 구단도 일본에서 돌아온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몸이 망가져 퇴출당한 그가 설 마운드는 없었다. 2003년도 구단 스카우트들이 선수를 뽑아가는 드래프트에 처음 도전할 때는 직구 시속이 131km가 나왔다. 훈련 초반이어서 시간만 지나면 충분이 140km대까지는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당시 기아· 한화 등에서 그를 보기 위해 스카우트들이 왔지만, 딱 두 번에 구속조차 재지 않았다. 그러면서 직구가 110km밖에 안 나온다는 말이 언론에 나돌았고 지명도 받지 못했다. 2004년 두 번째로 도전했지만 버림받기는 마찬가지였다. 20년을 야구천재로 산 그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치욕의 순간이었다.

부상에 이어 드래프트에서 두 번이나 미역국을 마시면서 그는 충격으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졌다. 3개월 동안은 거의 쓰러져 지냈다. 그 해 9월1일 그는 최진실과의 불화로 이혼까지 겹치며 만신창이가 됐다. 야구도 결혼도 실패하고 쓰러져 있던 그에게 허구연 MBC 해설위원이 돌파구를 만들어줬다.

2005년 3월부터 MBC ESPN 소속으로 TV 야구해설을 권유한 것. 유창한 말솜씨로 해설위원을 하면서도 야구에 대한 미련은 끝내 버릴 수 없었다. 해설가 생활을 2개월로 끝마치고 한화 이글스 김인식 감독의 용단에 의해 다시 선수 유니폼을 입게 됐다. 세 번의 도전을 무릅쓰고 그는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진출했다.

3수까지 하면서 마운드에 설 정도로 그에게는 야구가 절실했다. ‘야구 선수 조성민’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기에는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한화에서의 선수생활은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끝을 맺었다. 마지막 불꽃을 사르기에는 그의 몸이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다. 2007년 10월 ‘구단 방출’이라는 불명예는 그의 인생에 또 한번의 생채기를 냈다

조성민사태로 돌아본 ‘친권’문제

“재산상 권리와 무관하지 않아 잡음 불거져”

2008년 11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조성민의 친권회복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배우 김부선 씨가 시 낭송으로 모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친권의 법적 의미는 미성년인 자녀를 보호하고 감독하는 총체적인 부모의 권한이다. 여기에는 자녀에 대한 재산상의 권리까지 포함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고인인 최진실의 유족과 조성민 간에 분쟁이 발생한 것.

부모의 권리만 행사할 수 있는 친권자와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양육권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양쪽 부모가 공동 양육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제3자가 양육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협의되지 않을 경우에는 법적 절차를 거쳐 양육권자를 결정한다.

조성민 측과 고인의 유족 측이 양육권보다 친권을 강조한 이유는 재산상의 권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성민은 두 자녀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친권만 갖게 되면 자연적으로 고인이 남긴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5년 전 이혼 당시 조성민은 자녀들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고, 최진실은 2008년 5월 자녀들의 성을 최씨로 변경했다.

현행법 아래서는 친권을 갖고 있던 한 부모가 사망할 경우 친권을 포기했던 다른 부모의 친권이 자동으로 회복되게 돼 있다. 지난해 말 손숙과 허수경·김부선을 중심으로 몇몇 여성 연예인이 친권법 개정을 촉구하며 집회를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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