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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짚기>비틀어 본 문화-TV는 왕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뉴스와 교통상황을 번갈아 알려주는 아침 프로그램의 출근길 재촉이 한고비를 넘긴 8시 무렵.드라마 왕국이 제 백성을 불러모으는 전파를 내기 시작한다.지난해 봄 정년퇴직 후에야 비로소 왕국 신민(臣民)으로 합류한 50대 후반의 이모씨가

아침 밥상에서 뜻하지 않게 목소리를 높인 것이 바로 한달전,이 비슷한 시간이었다.

“아니,저녀석은

저게 도대체 뭐하자는 짓이야.”텔레비전속의'저녀석'은 극중 대학시절 애인이었던 유부녀와 다시 만나고 있는 탤런트 강모씨.본부인 역시 맞바람을 피우는 와중에서도 도대체 결론없이 질질 끄는 그의 모습은 사내 망신 혼자 다 시키고도 남을

만했다.그럭저럭 봐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참다 못해 한마디 던지자 아내가 바로 제압해버린다.“매일 보면서 무슨 잔소리예요.싫으면 보지를 말든가.”

드라마 왕국 신민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그도 안다.굳이 싫다면 다섯살배기 손녀 취향따라'뽀뽀뽀''TV유치원''혼자서도 잘해요'를 보다'아침마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는 걸.하지만'왕국'의 드라마답게 그 흡인력이,중독성

이 좀 만만한가.밥상을 온전히 물리기 전까지 3개 방송이 교대로 내보내는 드라마중에 적어도 두 편은 보게 마련이다.

1주일에 방송되는 드라마가 모두 서른여섯편.텔레비전을 내다버리지 않는 한 드라마를 피해갈 길이 거의 없어 보이는 것이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이곳,드라마 왕국의 현실이다.

30대 초반의

맞벌이 박모씨 부부는 이런 왕국에 사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에 속한다.대학시절'이제는 영상(影像)의 시대'라며 흥분했던 경험탓도 있지만 혼수로 텔레비전을 마련한 이상 이보다 값싸고 손쉬운 오락매체이자 정보매체가 또 있나 싶은

것이다.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리며 책장을 넘기는 수고도,대여료나 반납기일에 매이면서도 신작(新作)은 늘 없는 비디오가게같은 불편도 감당할 이유가 없다.

직장에서 돌아와 씻고 나면 밤8시30분.늦은 밥상을 마주한 부부의 시선은 때맞춰 시작하는 일일연속극에 가있다.3월초 개편으로 프로그램이 싹 바뀐 요즘은 채널을 돌려가며 등장인물 낯을 익히는 형편이지만 얼마전까지도 같은 회사 여사장

님 아들과 수위아저씨 딸이 결혼,어른들 공경하며 오순도순 사는 얘기를 보며 수저를 들곤했다.야근이다 회식이다 귀가가 늦어져 가끔 빼먹기도 하지만 큰 어려움은 없다.“앞에 5분만 보면 줄거리가 대충 짐작된다”는 것이 박씨의 지론이다.

8시30분

일일연속극이 애피타이저(전채요리)라면 메인디시(주요리)는 9시50분에 시작한다.

요즘같아선 월.화는 외제승용차.고급 옷가게가 눈요기로 등장하는 신 콩쥐팥쥐전,수.목은 땟국 줄줄 흐르던 시절을 정겹게 그려낸 복고풍 가족사(家族史)가 주요 메뉴.자칭 드라마 매니어인 박씨 부부는 메인디시 한편은 바로 보고,한편은

녹화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자연히 양부에게 성폭력당한 해외입양아 출신 은혜가 드디어 미치게 된 사연이나 개성상인 전처만의 손녀딸 태임이가 독립운동을 어떻게 도왔는지도 잘 안다.

주말은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드라마의 바다에 잠수하기 딱 알맞다.눈비비며 9시 아침드라마에 '전원일기'까지 일요일 오전에만 벌써 두 편.

재방송 전용인 토.일 낮시간은 주말연속극.청소년드라마.초저녁시트콤.자칭 화제작 미니시리즈까지 1주일 동안 못본 것을 말끔히 만회하는데 쓴다.물론 스포츠중계나 시댁.처가나들이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하지만 말이다.

혹시 막판에 와있는 드라마 후속편이 뭘까 궁금하다면 채널을 같은 방송사 저녁6시,7시 쇼프로그램에 고정시킨다.남녀주인공이 초대손님으로 나와 각자의 근황과 촬영 전반부의 에피소드를 들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말 저녁엔 리모컨만 차근히 누르면 최소 세 편은 너끈하다.교통사고로,파리유학으로 주인공들이 그야말로'갈 때까지 간'멜로물을 보며 혀를 차다가 프랑스식당 사장님의 공주병 연기에 비웃음같은 미소를 짓는다.곧이어서는 시대를 뛰어넘어

임꺽정이나 이방원과 더불어 나랏일을 걱정한다.이 근심이 월요일 출근걱정으로 이어질 때쯤에야 드라마 왕국의 마법에서 풀려난 두 내외가 한마디씩 한다.“아까 그 드라마말야.왜 맨날 그 모양이지.”“그러게.질질 끌기나 하고.” 〈이후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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