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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 시시각각

미국도 핵 폐기 모범 보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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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눈에 비친 북한 핵무기는 불륜이 낳은 사생아다. 태어나선 안 될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적자(嫡子)로 인정할 수 없고, 호적에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박박 우긴다. 사생아는 사람 아니고, 있는 아이를 없다 하면 없어지는 거냐고. 그러니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공식 입장에 배치되는 보고서가 미 정부기관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미 합동군사령부(USJFCOM)는 ‘2008년 합동작전 환경평가 보고서’에서 아시아 핵 보유국 명단에 중국·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과 함께 북한을 올렸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도 얼마 전 발표한 미래 예측보고서 ‘글로벌 트렌드 2025’에서 북한을 ‘핵무기 국가(nuclear weapon state)’로 명시했다. 미 정부는‘명백한 실수’라며 보고서를 수정하겠다고 펄쩍 뛰더니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외교용어로 ‘페 타콩플리(fait accompli·기정사실)’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최근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은 핵폭탄 여러 개를 제조했다”고 썼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 유세 기간 중 “북한은 핵무기 8개를 보유하고 있다”며 숫자까지 제시했다. 안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이트인 글로벌 시큐리티(globalsecurity.org)는 일찌감치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세상엔 두 종류의 나라가 있다.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나라와 보유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는 보유할 수 있는 나라다. 이들이 핵무기를 만들면 로맨스지만 나머지 나라가 만들면 불륜이 된다. 1970년 발효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그렇게 돼 있다. 그런 불평등 조약이 어디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힘의 논리고, 세상의 현실이다.

물론 이를 무시하고 핵무기를 만들 수는 있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NPT에 가입하지 않았고, 지금도 NPT 비회원국이다. 남아공은 핵무기를 만들었다가 NPT에 가입하면서 자진 폐기했다. NPT 회원국이었던 북한은 NPT를 들락거리다 끝내 핵무기를 만들었다. NPT 체제를 우롱한 셈이니 괘씸죄까지 더해진 가중처벌 케이스다.

NPT 제6조는 핵무기 보유를 공인받은 5개국에 대해 핵 군비 경쟁의 종식과 궁극적인 핵폐기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도 많게는 1만여 개에서 적게는 수백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자기들은 계속 갖고 있으면서 남들은 못 갖게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NPT 규정 위반이다. 오바마 당선인은 핵 감축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톰과 제리의 끝없는 숨바꼭질을 종식시키려면 미국도 핵 폐기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고양이 톰에게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음을 생쥐 제리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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