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보수는 악, 진보는 선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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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연세대에서 특강을 했다. 그가 특강에서 "지도적 인사들이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면 그 사회의 신뢰가 붕괴된다"거나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상생"이라고 한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그러나 몇몇 대목에선 치우친 인식과 편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 우려된다.

우선 진보.보수관이 그렇다. 盧대통령은 보수에 대해 "힘센 사람이 좀 맘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하자, 약육강식이 우주 섭리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다"고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盧대통령은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진보에 대해선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뤄 살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더불어 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수는 자본가와 사회적 강자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며, 진보는 인간미 있는 공생의 논리라고 매우 거칠고 부정확한 자기 나름의 이념관을 밝혔다.

盧대통령의 이 같은 정의가 맞느냐 틀리냐를 떠나 나라를 통합하고 갈등을 아우르며 가야 할 대통령이 '보수=악, 진보=선'이란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심히 우려된다.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상생을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 논리대로라면 건강한 보수를 내세우는 한나라당이나 대기업 등과 어떻게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

경제 위기론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경제 위기론 때문에 무리한 성장 정책을 쓰다 보면 뒷날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나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론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한다. 기업들이 정치.사회적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꺼린다는데 이런 분위기는 대통령의 이분법적 사고와 과연 무관한 것일까. "잘 관리하고 있으니 문제 없다"는 盧대통령 말대로 경제가 잘돼 주기만 바랄 뿐이다.

대통령은 말을 아껴야 한다. 더 중요한 건 대통령이 정치.경제.사회 현상에 대해 건강하고 균형 있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