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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08] 갈피 잡지 못했던 학술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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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 17대 대선에서 보수 진영은 유효 투표수의 63.75%(이명박 48.67%+이회창 15.08%)를 얻으며 권력의 시계추를 좌에서 우로 돌렸다. 보수 진영의 이념적 승리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념의 시계추는 방향을 잃고 멈춘 듯 보인다. 보수 진영은 4월 총선에서도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곧이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 시위’ 앞에서 정국 주도력을 잃었다. 하반기 들어서는 세계적인 ‘금융 위기’ 앞에 경제 성장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스킨십 외교’는 짧았고, ‘진보적 자본주의’를 내세운 오바마 정부의 등장을 맞아야 했다. 김호기(48)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이를 “국민 국가의 시간과 세계사적 시간의 불일치”라고 표현했다. 국내에서 이명박 정부라는 본격적 신자유주의 정권이 등장했으나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 

이런 가운데 뉴라이트 진영 내에서는 “뉴라이트는 죽었다”는 선언도 나왔다. 보수세력이 다시 한번 자기 혁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국내외적 돌발 상황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과거 정권에 대한 평가와 새 정권의 성격 규정을 통해 지식인 사회가 새롭게 재편될 수 있는 기회가 지연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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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뉴라이트는 죽었다”
정책 대안 없음을 반성

보수 진영은 지난해 대선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이 바뀌는 계기로 판단했다. 진보 진영조차 패배를 자인한 터였다.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설계도가 장기간 한국사회의 변화를 틀지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4월 총선까지 계속된 보수진영의 정치적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상반기의 촛불시위는 보수 진영의 이념적 승리가 탄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 하반기의 금융위기는 ‘경제 살리기’라는 우파의 대표적 상품가치가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정권에 비하면 보수 진영 학자들의 권력 진출도 현재까지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뉴라이트’ 진영의 일부 논객들은 현 정부에 대해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보수진영 내에서는 “뉴라이트는 죽었다”는 선언까지 나왔다. 뉴라이트 진영의 대표적 학자인 김일영(48)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달 한 말이다. 10년 만에 출범한 보수정권이 채 1년도 되기 전에 나온 ‘뉴라이트 종식 선언’이다. 김 교수는 뉴라이트 운동이 지나치게 정치화·권력화했으며, 운동 자체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뉴라이트 운동은 끝났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 학계에서 벌써부터 ‘정책 대안의 미비’에 대한 자기 반성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논란은 올해 한국 사회에 많은 고민을 안겨 줬다. 진보 진영은 ‘촛불 시위’를 새로운 대중적 의사 소통 방식으로 높이 평가한 반면, 보수 진영은 이에 비판적이었다. 촛불시위를 둘러싼 날카로운 대립은 결과적으로 보수·진보 진영의 생산적 대화를 어렵게 했다는 의견도 나왔다. [중앙포토]

◆뉴라이트 ‘남용된 이름’=‘뉴라이트’란 용어를 버릴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뉴라이트 진영으로 통칭되는 세력의 지향이 출발부터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현재 ‘뉴라이트’로 인식되는 세력은 크게 세 단체로 나뉜다. ▶뉴라이트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 ▶시대정신재단(이사장 안병직)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이다.

정책연구에 주력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원래부터 ‘뉴라이트’란 용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중도보수 세력이다. 이 단체의 이용환(59) 사무총장은 “우리는 운동단체가 아니라 건전한 정책대안 기관이다. ‘뉴라이트’니 뭐니 하는 구분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지식인 중심의 이념운동에 주력하는 시대정신재단은 지난 10월 ‘뉴라이트재단’에서 이름을 바꿨다. 이는 대중의 오해나 일부 정치단체의 의도적 왜곡 속에서 ‘뉴라이트=극우 보수세력’이란 잘못된 등식이 퍼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김일영 교수는 “왜곡된 편가르기 이념 논쟁 속에서 본래 지향과는 다르게 뉴라이트와 올드 라이트의 경계선이 무뎌졌다”며 “좌·우 대화를 통해 사회통합을 중시하는 합리적 보수세력으로서 ‘뉴라이트’라는 브랜드 가치가 훼손됐다”고 말했다.

결국 ‘뉴라이트’란 이름을 걸고 있는 단체는 대중적 시민운동에 주력하는 뉴라이트전국연합 뿐이다. 이 단체는 ‘올드 라이트’ 계열에 속하는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등과도 줄곧 연대를 해왔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제성호(50) 전 공동상임대표는 “뉴라이트에 ‘친일 세력’ ‘독재 미화 세력’이란 이미지를 덧씌운 것은 시대정신 그룹 중심의 교과서포럼 측 지식인들이지 전국연합의 뉴라이트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전국연합과 올드 라이트는 촛불시위 정국에서 온건보수 진영이 침묵 내지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섭섭함을 갖고 있다.

◆‘과잉 정치화’와 거리 둘 것=제성호 전 대표는 “뉴라이트가 정치운동 단체로서만 활동하면 이명박 정부 4년 뒤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다”며 정치색을 줄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시민운동 본연의 모습에서 취약계층 돕기와 나눔 운동 등 ‘따뜻한 보수’를 실천하는 단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정신재단은 정책 대안 제시에 주력하며 좌·우 대화를 회복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일영 교수는 “정권의 생명과 무관하게 10년, 20년 뒤를 내다 볼 내실 있는 보수주의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지난달 ‘한국사회의 보수를 말한다’ 심포지엄에 이어 내년엔 ▶진보를 말한다(3월) ▶한국사회 보수와 진보의 나아갈 길(6월) 등 잇따라 좌·우 지식사회의 대화를 마련하고 있다.

진보
‘노무현 실패’ 분석 미흡
지식사회 재편도 지연

진보 진영은 호된 시련의 한해를 맞을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다. 대선과 총선에 연이어 패배할 것이란 예상도 올 4월까지 적중했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촛불시위’가 터졌다. 진보학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거리의 행렬에 진보 진영은 새로운 힘을 얻는 듯 했다. 하지만, 촛불시위는 과연 진보 진영에 일방적인 ‘선물’이었던 것일까.

김호기(48) 연세대 교수는 “결과적으로는 촛불시위가 좌·우의 이념 대립을 강화시켜 생산적 대화를 가로막은 측면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올 상반기 촛불시위가 좌·우 각 진영의 ‘이념적 정체성’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어 세력 간 소통의 부재를 낳았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 학계는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 단시일 안에 위기에 직면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올 한 해 보수 지식인들이 당혹해 한 것 이상으로 진보 지식인들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놀라야 했다.

◆짧았던 성찰의 시간=조희연(52) 성공회대 교수는 “진보진영은 대선 패배 이후 긴 성찰의 시간을 가질 뻔하다가 촛불시위라는 새로운 저항 방식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놓고 바빴다”고 말했다. 정권 교체 뒤에 당연히 있었어야 할 ▶새 정권의 성격 규명 ▶지난 정권의 ‘실패’ 분석이 심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진영 학술·시민단체들은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 시절과 출범 100일에 맞춰 토론회를 가진 바 있으나 출범 6개월 토론회는 무산됐다. 새 정부 집권 1년 사이에 지식인 사회의 토론이 가장 생산적이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시기를 놓친 셈이다. 진보 진영의 단체들은 상반기 내내 촛불시위에 대한 평가에 매달렸다. 이어 가을부터 국제적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 다시 한번 정권 평가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김호기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를 촛불시위와 금융위기에만 연관 지어 판단해서는 평가가 일면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시대에서 세계화의 시대로 완전히 바뀌는 상징적 계기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지식사회도 민주화 시대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세계화 시대에 맞는 이념 지형으로 재편됐어야 하는데, 올 한 해 두 차례의 커다란 사건들이 지식사회의 재편을 지연시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서유석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촛불시위 자체를 놓고 좌파와 우파를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좌와 우의 양 극단에 서서 촛불 시위를 이념의 검증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좌든 우든 ‘정책 역량’의 문제=경상대는 내년 봄학기부터 국내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석·박사 과정을 운영한다.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전통 좌파 사상을 재검토한다는 의미다. 내년에는 진보학계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와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의 성격 규정에 대한 본격적 토론이 전개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론은 첨예하되 정책 대안은 무딘 ‘담론 싸움’만 불거질 가능성도 크다. 

조희연 교수는 “앞으로 보수든, 진보든 대안적 정책역량을 갖추느냐가 문제다. 노무현 정부가 지식인 사회를 비판했던 것은 원칙에 대한 이론 말고 실천적인 정책을 달라는 요구였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 하에서 보수학계가 내놓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정책이 더 빨리 고갈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유석 대표는 “이명박 정부 초기에 우파 진영의 학자 중에서 역량 있는 이들을 발탁하지 못한 것 같다”며 “현 정부가 정책이 아니라 이념의 문제로 접근하면 지난 정부의 실패를 반복하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세계화 시대에는 진보와 보수의 해법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논의하다 보면 과거 민주화 시대의 보수·진보 구도가 새롭게 재편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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