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평등에 발목 잡힌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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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제는 돈 버는 싸움이다. 세계를 상대로 싸워 이겨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잘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전쟁에 내보내야 한다. 그들이 이기면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 온다. 그러면 후방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이 돌아간다. 설혹 그들이 전리품을 조금 더 차지한다고 해서 미워해선 안 된다. 그게 미워 전투 실력이 없는 보통사람을 전쟁에 내보낼 수는 없다. 경쟁력이 있는 대기업들을 전쟁에 앞세워야 하는데 야당의 주장을 보면 대기업=악, 중소기업=선이라는 관념에 매여 있다. 대기업들을 출자총액제한, 금산 분리라는 규제로 발목을 묶어 놓고 있다. 수도권 규제도 마찬가지다. 경쟁력이 있는 수도권을 선두 부대로 내보내 이기면 그 전리품은 골고루 전국에 퍼진다. 모든 지역이 평등하자는 명분 때문에 수도권을 뒤로 빼는 어리석은 일을 왜 하고 있는가. 우리나라가 살 길은 서비스 분야라고 말한다. 서비스의 핵심은 차별화와 고급화다. 평등의식으로는 우리의 서비스 산업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평준화된 교육, 평등한 의료 대우만을 원하기 때문에 이 분야가 발전이 안 된다. 의료를 고급화해야 해외 환자를 유치할 수 있는데 평등한 의료 대우를 내세우며 의료법을 붙잡고 있고, 교육법을 고치지 않아 해외의 좋은 대학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없다. 이런 걸 모두 법으로 결정해야 하는 국회는 평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평등은 장미처럼 가시가 있다. 명분이 좋으나 이를 실현코자 할 때 부작용이 생긴다. 인간 본성과 맞지 않는 평등을 실현하려면 강제성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공산주의처럼 독재로 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부작용은 평등으로는 발전이 안 된다는 점이다. 발전을 하려면 서로 경쟁하고 실력을 겨뤄야 한다. 그 결과 차별이 생기는데, 평등은 이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전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소액 신용대부 은행을 세워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누스는 “만일 당신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가 실패하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일이더라도 세계를 더 좋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선입니다”라고 말했다. 경제적 평등이라는 문제도 바로 이런 것이다. 평등이라는 단어의 매력과 현실에서의 성취는 다르기 때문이다.

국회가 싸움판이니, 비효율적이니 하는 지적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정치가 평등주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평등의 목소리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평등을 정치를 통해 직접 달성하려 할 때 그 가시에 찔려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평등은 우회적으로, 간접 방식으로 접근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는 결과로서의 평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를 주어 경쟁에 참여케 만들고, 그 결과로 인해 사회가 부유해질때 평등은 점진적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이 수단의 하나가 교육이다. 빌 게이츠가 지금의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며 ”불평등은 인간의 잠재력을 허비하고 사회적 기회를 박탈한다”면서 “교육 기회의 확대만이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위기라는 발등의 불 때문에 우리는 교육 문제를 소홀히 하기 쉽다. 어려울수록 교육과 학교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과 투자를 해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인 번영과 평등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