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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라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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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라크전쟁은 21세기형 정보전의 개가로 꼽힌다. 첨단 장비로 수집한 정보를 통해 정확한 공격 대상을 찍어 외과 수술하듯 정밀폭격으로 도려냈다. 그런데 미국의 정보 수집엔 허점이 있다. 첩보위성과 고공정찰기를 동원한 항공촬영 등 영상정보, 유무선 통신장비를 도청해 얻는 신호정보 수집은 탁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간정보(Human Intelligence)가 부족하다. 특히 이라크처럼 종교와 문화가 다르고, 후세인 같은 철권통치가 오래된 나라에서 미국의 정보원이 활동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미국이 대안으로 찾은 정보원이 망명객이다. 대표적 인물이 아흐메드 찰라비(59)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이다.

사실 찰라비는 망명객이라 보기 힘들다. 13세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가 대학까지 마친 그는 요르단으로 날아가 은행업에 종사했다. 1990년 요르단 법정은 31건의 사기.횡령 혐의로 찰라비에게 22년형을 선고했다. 그는 이미 89년 친구의 차 트렁크에 숨어 도망쳤다.

찰라비의 망명 행각은 이때부터다. 망명보다 도피에 가깝다. 찰라비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INC라는 망명 조직의 대표가 됐다. 그는 후원자인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목말라 하는 정보를 적절히 제공했다. 콜린 파월이 이라크전쟁 직전 유엔 연설에서 대량살상무기(WMD)의 증거라고 역설했던 '이동형 생물무기 실험실'도 그의 측근이 제공한 엉터리 정보다. 덕분에 그는 이라크전쟁 후 특별기로 금의환향했다.

일년여 만에 찰라비의 본색이 다 드러났다. WMD는 흔적도 없고, 미군과 자신을 마중나오기로 돼 있다던 환영 인파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난해 화폐개혁 당시 부정을 저지른 흔적이 드러났고, 경호원을 동원해 납치와 폭행을 자행한 증거들이 포착됐다. 다급해진 찰라비는 급기야 미국을 비난하면서 시아파를 선동하는 반격에 나섰다. 네오콘도 그를 포기했다.

지난 18일 찰라비에 대한 지원(매달 40억원)을 끊었다. 이틀 뒤 이라크 경찰이 그의 집을 수색했다.

26일 뉴욕 타임스가 "거짓 정보에 사기당했다"는 반성문을 사설로 실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반성해야 할 사람은 많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