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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기쁨 <92>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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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 30면

지난 주말 집으로 초밥을 배달시켜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으려고 셀러를 살펴보니 베르나르 모레의 ‘퓔리니 몽라셰 프리미에 크뤼 라 트뤼피에르’ 2006년산밖에 없었다. 2006년이면 아직 때가 이르다 싶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레드 와인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마개를 땄다. 역시 예상대로 신맛이 강했고 과일 맛과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날로 발전하는 디캔터 대용품

난처했지만 초밥이라 와인이 익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디캔터를 꺼내기도 귀찮아 서랍에 넣어둔 ‘디캔팅 포어러’라는 디캔터 대용품을 사용하기로 했다. 종이를 통 모양으로 만 듯한 포어러를 병 주둥이에 대면 디캔터와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손쉽고 빠르게 와인의 맛을 열 수 있다. 포어러를 이용해 잔에 붓자 ‘꼴록꼴록’ 공기와 섞이는 소리가 나면서 완고하게 닫혀 있던 와인이 저항감 없이 마실 수 있을 만큼 변했다.

덴마크의 한 디자인 회사가 만든 이 디캔팅 포어러는 물리학 이론에 기초해 개발된 하이테크 상품이다. 파이프 한가운데에 있는 금속 부분에 크기가 다른 구멍이 몇 개 뚫려 있고 이곳으로 와인이 통과하면서 공기 중 산소를 끌어들이게 된다고 한다. 덕분에 와인과 공기를 만나게 함으로써 맛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디캔팅과 비슷한 효과를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얻을 수 있다.

우리 남매는 가끔 포어러를 댄 상태로 디캔터를 사용할 때도 있다. 그렇게 하면 디캔팅을 두 번 한 것 같은 효과가 생겨 바위처럼 단단한 와인도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며칠 전에는 일본의 와인 전문잡지 ‘와인아트’ 편집부에서 보르도의 2005년 1급 샤토 와인들을 시음했다. 편집부원들은 ‘벤투리’라는 신형 디캔터 대용품을 사용했다.

와인 잔에 주둥이 부분을 직접 담가 숙성을 유도하는 도구 클레 뒤 뱅.

이것은 ‘신무기’라 불릴 만큼 경이로운 상품으로 병 주둥이에 달고 와인을 따르면 ‘쿨렁쿨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와인이 공기와 마구 섞이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소리가 과격해 우아함은 약간 떨어지지만 와인을 여는 파워만큼은 대단해 암석 같았던 2005년산 1급 와인도 단번에 부드럽게 바꾸어 놓았다. 그 강력한 힘에 반한 나는 이 상품을 구하려고 집요하게 인터넷을 뒤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찾지 못했다.

와인 애호가인 한 친구는 “디캔팅 포어러보다 클레 뒤 뱅(Clef du Vin)이 향기가 덜 날아가 좋다”고 추천했다. 클레 뒤 뱅은 금·은·동 합금으로 만든 곡옥(曲玉) 모양의 기구를 와인에 담가 숙성을 촉진하는 도구다. 100㏄ 와인에 1초만 담가도 1년간 숙성시킨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니 ‘마술’과 다름없다. 친구에 따르면 클레 뒤 뱅은 세계적인 발명 콩쿠르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디캔터 대용품의 품질은 해마다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상품을 사용했을 때 향기가 약해지거나 와인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등 문제도 적지 않다. 와인은 역시 느긋하고, 끈기 있게 숙성을 기다렸다 마시는 것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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