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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파괴병치매>上. 한 치매 가족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지난해 3월의 일이다.10년째 모시고 살던 친정아버지(76.서울강북구우이동)께서 하루는 집앞 공터에 나가 철조망을 둘러치셨다.“우리집에 딴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기억력이 다소 흐려지기는 했어도 정정하셨던 아버지의 난데없는 행동에 가족들은 무척 당황했다.나에게까지 아버지는“네가 누군데 남의 땅에 들어오느냐”며 욕설을 퍼부으셨다.기막힌 일이었다. 가족회의 끝에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치매입니다.중증이라 지금 치료하기에는 늦었습니다.가족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돌봐드리는 길밖에 없군요.”

의사의 설명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캄캄했다.무어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남의 얘기로만 알았던 치매라니…'.

병원에서 돌아온 후 아버지의 기행(奇行)은 날로 심해져 갔다.어디선가 페인트를 구해 오셔서는 집안 벽마다 울긋불긋하게 칠하셨다.한밤중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쳐오기도 했다.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당신 외손자)의 요구르트를 방

안에 몰래 숨겨놓기 일쑤였다.

지난해 8월 아버지는 이웃집 빨래를 훔치다가 들켜 경찰에 넘겨졌다.가족 모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끝에 겨우 처벌은 면할 수 있었지만 동네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가족들도 눈물로 밤을 지새는 날이 잦아졌다.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은“외할아버지가 밉다”며 울음을 터뜨렸다.다 큰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집에 들어 오기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한여름인데도 털옷을 껴입으셨다.부엌에 들어가 참기름 한 통을 단숨에 들이키신 적도 있었다.심지어 부엌과 화장실 세면대에 용변을 봐 우리가족을 절망속에 빠뜨렸다.

“아버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울면서 매달려 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딴 사람이셨다.일제시대 히로시마에서 고등학교를 중퇴하신 후 영어.일어에 능통하고 클래식 음악을 즐기시며 고향인 평남진남포 얘기를 들려주시던 멋진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아버지를 볼 때마

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함께 원망이 솟아났다.'차라리 편히 돌아가셨더라면'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차마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8개월정도 지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가족들은 아버지를 전문요양기관에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가족이 있는 치매노인을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지만 수소문 끝에 서울송파구의 한 노인복지관으로 모실 수 있었다.한달 비용 1

백20만원에 6개월이 지나면 귀가시킨다는 전제조건이 붙은 채였다.

지난해 12월초 아버지를 복지관에 모셔 드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던 날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하늘이 원망스러웠고'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죄책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6월이 되면 아버지를 집으로 다시 모셔야 한다.너무도 죄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1남4녀 5남매중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우리를 이만큼 키워주신 아버지가 이를 아신다면….치매는 가정전체를 파괴시키는 너무나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자식들 모두 몸으로 느끼고 있다.“아버지,제발 이전의 건강한 모습을 단 한번만이라도 자식들에게 보여주세요.” [정리=정제원.최준호 기자]

<사진설명>

자식 원망하나

서울 S복지관에 수용된 한 치매노인이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박순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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