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현실' 파고든 저자 '매트릭스'에도 영향 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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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걸프전쟁 당시 장 보드리야르(1929~2007)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제목의 칼럼을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과 영국의 ‘가디언’에 게재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미사일이 투하돼 목표물이 파괴되는 장면은 실제 아주 무섭고 비참한 것이지만, 안방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속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논리였지요. 이 칼럼은 그가 편 독창적인 이론 ‘시뮐라시옹(Simulation)’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목격한 걸프전쟁이 ‘가짜 전쟁’이듯, 현대인이 접하는 모든사물이 기호화되면서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70년에 발표된 소비의 사회는 ‘시뮐라시옹’이론을 경제 영역에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들이는 상품들의 실제는 그 사용가치라고 할 수있습니다. 냉장고는 음식을 차갑게 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들은 그 효용에 준하는 가치를 지불해야 하지요. 하지만 냉장고를 구입하는 현대인은그 사용가치보다 경제적 지위나 광고•유행 등에더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보드리야르의 저작 중 비교적 읽기 쉬운 책으로 꼽힙니다. 기호학과 마르크시즘에 관한 기초지식이 있으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Ⅰ’를 보면 해커로 살아가던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가 고객이 찾아오자 서가에서 책 한 권을 집은 뒤 책 속에 있던 불법 소프트웨어를 건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책 이름은 보드리야르의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 감독을 맡은 워쇼스키 형제가 보드리야르의 팬이었다고 하네요. 무더운 휴가철,매트릭스 세계처럼 난해하면서도 흥미로운 보드리야르와 씨름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