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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한골프의 느낌이여!

중앙일보

입력

스카버러(Scarborough),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지명일 것이다. 사이먼과 가펑클(Simon & Garfunkel)이 부른 'Scarborough Fair'. 이 곡은 1960년대를 풍미한 영화 <졸업>에 삽입 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 전세계가 스카버러를 노래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스카버러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아마도 <졸업>의 배경이었던 캘리포니아 UC버클리 근처의 시장쯤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까?

스카버러는 잉글랜드 노스요크셔주에 위치한, 북해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사이먼이 영국을 여행하던 중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요 'Scarborough Fair'를 듣게 되었고 이 노래에 편곡과 가사를 입혀 불후의 명곡 'Scarborough Fair'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스카버러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묘한 가사 덕에 신비로운 무언가를 간직한 도시로 많은 이들의 기억 창고에 보관 되게 되었다.

이 스카버러에서 10분 남짓 인근에 위치한 Ganton GC는 세계 100대 골프장 중의 하나로, 잉글랜드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랜드 명문 골프장이다.

비가 날리던 오전과는 달리 오후가 되면서 날이 좋아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부터 시작된 강행군 피로가 누적되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리버풀까지 이동할 계획이었기에 Ganton GC에서는 9홀만 돌기로 했다.

그러나 골프장으로 접어드는 순간,
아아… 이 얼마 만에 만나는 이~일~소옹~정 푸른 솔이던가? 게다가 저 눈 부신 초록 잔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이 대한골프의 느낌이여! (내노라하는 영국 골프장들을 거의 둘러보았지만 한국 골프장만큼 관리가 잘 된 골프장도 드물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클럽하우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려 곧바로 잔디를 확인했다. 발바닥을 탄탄하게 밀어 올려주는 탱탱한 양잔디의 탄력… 그간 땅바닥에 짝 달라붙어 낮은 자세로 포복하는 링크스 누런 잔디 덕에 맘 놓고 우드를 휘둘러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드디어 우드의 여재 귀환을 알린다.
“다 주거쓰~ 모두 눈 깔어….”
18홀 콜이다!

이미 Ryder Cup, Curtis Cup, Walker Cup을 두루 개최한 화려한 전력의 Ganton GC. 만약 브리티시 오픈이 링크스만 고집하지 않고 모든 골프장에 문호를 개방한다면 개최지 후보군으로 제일 먼저 거론될 인랜드 골프장 베스트3 중에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하지만 클럽하우스는 골프장 랭킹에 비하면 지나치게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마치 가족이 운영하는 동네 골프장처럼 모든 것이 소박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돼지 사육장 냄새가 다소 코 끝에 거슬렸다. 하지만 그 동안 링크스에서 바다 냄새만 맡고 다닌 탓에 땅 냄새나 가축 냄새에 더 민감해진 것이리라 너그럽게 생각했다.

캐디 마스터 Michael Purdie

영국 골프장 매니저들과 얘기해보면, 브리티시 오픈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다들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지만 브리티시 오픈 운영에 관련해서는 보수적이고 고루한 R&A의 방식에 상당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오래된 링크스들의 나눠먹기식 대회 운영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역사성을 겸비한 링크스’라는 개최지 조건 때문에 제 아무리 뛰어난 코스를 가지고 있어도 신생 골프장들은 명함을 내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개방적이고 총체적인 가치판단으로 개최지를 선정하는 Walker Cup이나 Ryder Cup의 개최지 선정에 대한 신뢰도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Ryder Cup, Curtis Cup, Walker Cup을 일찌감치 치러낸 Ganton GC는 최고의 골프장 그룹으로 공증을 받은 셈이다.

Ganton GC는 역사로 따지더라도 어느 링크스에 뒤지지 않는다. Ganton GC의 역사성은 무엇보다 해리 바든(Harry Vardon)과의 개연성으로 특화된다. 1891년 Ganton 골프장을 오픈하고 5년 후인 1896년 Harry Vardon이 이 곳에 프로로 왔다. 해리 바든… 혹시라도 그의 이름이 생소한 이가 있다면 '바든 그립'을 상기하시길. 오른쪽 새끼손가락과 왼쪽 집게손가락을 오버랩핑하는 교과서 그립을 고안해 낸 이가 해리 바든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전설, 브리티시 오픈 6번 우승( 1896, 1898, 1899, 1903, 1911, 1914)의 천재 골퍼가 바로 해리 바든이다.

사상 최초로 브리티시 오픈과 US오픈을 동시에 석권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의 기록들은 대부분 이 곳 Ganton 골프장에 프로로 몸 담고 있었던 7년 동안 이룩해낸 것이라고.

영국 골프장에서 가장 포토제닉한 피사체 중 하나인 지붕 꼭대기의 풍향계. Ganton GC 그늘집에서 발견한 이 풍향계의 주인공은 누굴까? 그렇다. 해리 바든이다. Ganton GC에서는 클럽하우스부터 야디지 북까지 어디에서나 해리 바든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눈에 띈 것은 1번 스타트 홀 티잉 그라운드 옆에 붙어 있는 경고성 문구들이었다. 명문 골프장이라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자세히 한 번 들여다 보자. 한국에서 카트 타고 티박스에 올라가거나 개를 데리고 코스에 들어갈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이들 간과하는 두 가지, 티박스에서의 연습 스윙 금지, 코스에서의 연습 금지. 이 무시무시한 문구는 골프 룰에도 명문화 되어 있다고. 코스에서 연습 스윙을 할 때 디봇을 만들면 골프장 측에서 퇴장까지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연습 스윙 때는 디봇 팍팍 찍어 내다가 정작 진짜 스윙 때는 탑 볼을 때리고 마는 심약한 골퍼들… 자나깨나 잔디 보호. 타핑 난 볼 자국도 다시 보자. 떼운 디봇도 다시 밟자.

Ganton 골프장은 이다겸 선수에게 날개를 달아준 골프장이었다. 오랫만에 비 한 방울 맞지 않았고 18홀 내내 뽀송뽀송한 햇살 아래에서 바람 한 점 없는 평온함과 탄탄한 잔디의 탄력을 느끼며 맘껏 우드를 휘두를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잘 관리된 레이아웃과 조경들이 매 홀마다 변화무쌍한 비주얼을 만들어 카메라도 덩달아 즐거웠다.

무엇보다 Life Best를 갱신하여 84타 스코어 카드를 받아 들고 눈물 콧물 감격으로 범벅된 벅찬 감정을 추스르기도 했다. 그 동안 링크스에서 받았던 지옥 훈련이 이제야 진가를 발휘하는 모양이다. 이 참에 프로 선수로 전향해 버릴까?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