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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역사 그물망을 생각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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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겨울의 어느 날 마당 한쪽에서 남편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조심해. 아주 무서운 놈들이야. 나도 한방 쏘였다고. (어머나!)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다 소탕했거든.(휴!) 남편은 멀뚱멀뚱 정신없는 표정을 짓는 나에게 느닷없이 출몰한 말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당에 푸성귀 모종을 심던 화창한 봄날에는 토마토밭 끄트머리의 단풍나무 가지에서 막 분봉(分蜂)을 끝낸 꿀벌 무더기를 발견했다. 꿀벌들은 언제부턴가 마당의 다른 쪽에 집을 짓고 있었고, 거기서 딴살림을 낸 무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얼마 뒤 남편은 등에란 놈을 발견했고, 꿀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놈들을 보는 족족 잡아없애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삼사년 전 담장 곁에 높직이 웃자란 나무들을 쳐낸 뒤 마당에 스며들기 시작한 따스한 양기(陽氣). 재작년께 마당에 잔디 대신 뿌린 토끼풀 더미에서 피어나던 향긋한 꽃들. 그리고 마당 곳곳을 돌아다니며 골똘하게 들여다 보기 좋아하는 아들의 입에서 입춘 무렵부터 튀어 나오던, '왜 이렇게 벌이 많지?'라는 중얼거림. 하지만 내게는 모든 사건들이 저마다 따로 생겨났다가 따로 사라지는 것들로 여겨졌다.

인드라의 그물망.'화엄경'은 모든 개체가 커다란 그물망의 매듭에 달린 보석처럼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를 비추며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둡기만 할 따름인 인간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개체가 저마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든 개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건도, 세상의 모든 역사적 사건도 저마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들로 보인다.

나는 지금 오일팔과 육이오 사이에 서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 각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있음으로 해서, 마침내 그것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달리 말하면 어제는 오일팔에 코를 박고 있다가 내일은 육이오에 코를 박게 될 형국이어서, 결국 이것들 모두는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흐릿한 허깨비 같은 형상으로 감지된다. 하지만 한순간 세상의 모든 인연 위에 드리워진 그물망이 눈에 들어오듯, 다른 순간에는 세상의 모든 사건 위에 드리워진 인과의 고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인즉슨 나는 말벌과 등에.꿀벌의 출몰이 던져놓은 퍼즐을 기적적으로(?) 끼워맞추는 순간, 문득 오일팔과 육이오를 하나로 꿰뚫는 관계의 그물망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흔히 이야기되는 역사적 비전(vision)의 속살일는지도 모른다.

박명림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 1950 전쟁과 평화'를 참고하면, 그것은 예컨대 관용 자체를 위해서라도 정의없는 관용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든지, 대국(大局)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국(小局)에 대한 희생을 내세우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다든지, 전쟁이란 명백히 정치적 실패의 산물임에도 그것을 정치의 연속이라고 우겨서는 안된다든지, 냉전과 열전, 평화와 전쟁은 그리 먼 것이 아니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뜨거운(hot) 전쟁이 일찌감치 제거해 버린 차가운(cool) 시선을 복귀해야 한다든지, 거대한 명분 뒤에 도사린 은폐된 만행을 향해 눈을 부릅떠야 한다든지, 비극적 역사는 파토스적인 접근에 뒤이은 로고스적 재구성을 통해 분노에서 위무로 승화시켜야 한다든지.

나는 다시 오일팔과 육이오 사이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는 좀 더 예민하고, 좀 더 깐깐하며,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하리라. 그리하여 그것들 전부를 꿰뚫는 선명한 역사의 그물망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말벌과 등에와 꿀벌의 퍼즐, 토끼풀꽃 사이를 돌아다니며 풀숲 속을 뚫어져라 살피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자연 속에 변함없이 펼쳐진 인드라 그물망의 존재와 마주칠 수 있었듯이 말이다.

강영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