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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컴퓨터통신.인터넷 홈페이지서 자구책 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빌 클린턴·조지 부시·로스 페로·봅 도울·빌 게이츠의 공통점은?’

정답은 이들이 모두 왼손잡이라는 것이다.인터넷의 ‘로즈마리 웨스트 왼손잡이 페이지’에 실린 퀴즈다.정답란엔 이런 농담까지 덧붙여져 있다.‘만일 빌 게이츠가 2000년과 2004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연이어 선출된다면 미국은 20년동안 왼손잡이 대통령이 이끌어가는 셈이다.그러니 미국이 우경화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 누구인가.’

클린턴·도울·페로가 격돌한 미국 96년 대선은 말 그대로 왼손잡이들의 대결이었다. 클린턴의 러닝메이트 앨 고어마저 왼손잡이였다.퀴즈의 명단에서 제외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강경한 ‘우파’로널드 레이건도 손잡이만은 ‘좌파’였다.그러고 보면 클린턴까지만 쳐도 백악관은 20년동안 왼손이 지배하는 셈이다.

최근 전·현직 미국대통령의 거동을 TV를 통해 유심히 보면 그들이 왼손으로 서명하는 모습을 간혹 목격할 수 있다.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엔 한국보다 왼손잡이들이 훨씬 많다든가,왼손 사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오해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왼손잡이는 억압받거나 최소한 따돌림당해왔다.또한 왼손잡이의 비율은 5~30%로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가 특별히 적다고 볼 근거는 별로 없다.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왼손잡이를 무시하는 관습은 뿌리 깊다.가정·학교에서 왼손으로 밥을 먹거나 글쓰는 일은 ‘바로잡아야’할 나쁜 습관으로 받아들여졌다. 왼손잡이 기미가 보이면 유아때부터 오른손을 사용하도록 가혹하게 훈련받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컴퓨터통신 나우누리엔 ‘왼손사랑모임(약칭 왼사모)’이란 왼손잡이들의 동호인 모임이 있다.다음은 이곳의 자유게시판에 실린 ‘오리지널 왼손잡이가’라는 제목의 글.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 말이지 담임선생님이 아주 깐깐한 여자였는데 왼손잡이는 병신이라고 했다.그래서 날 항상 구박했다.내 옆에 앉아 있는 애를 시켜 날 감시하게 만들고,내가 왼손으로 쓰면 당장 일러바치도록 했다.그러니 수업시간에 공부가 되랴.필기는커녕 한자 한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결국은 우리집까지 와서 들들 볶았다.”<95.10.23>

게시판에는 이외에도 교련시간에 총검술을 왼손으로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가 ‘비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맞은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 술을 왼손으로 따랐다고 선배한테 따귀맞은 한 대학생의 이야기등 한국사회에서 왼손잡이들이 겪는 갖가지 시련이 절절하게 담긴 글이 종종 올라온다.요컨대 한국사회에서 왼손잡이는 ‘불구자’로 취급되는 것이다.

우리 언어에도 이런 편견이 감춰져 있다.오른손의 어원은 ‘옳은 손’이다.바른손이 오른손의 동의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영어에서 ‘right’가 ‘오른쪽’‘올바른’을 뜻하는 것과 일치한다).이와는 반대로 왼손잡이는 ‘짝잽이’‘짝배기’등의 비어로 지칭된다.반대나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왼고개를 젓다’,비아냥거림을 뜻하는 ‘왼새끼를 꼰다’,현재의 직위보다 낮은 직위로 옮기는 것을 뜻하는 ‘좌천(左遷)’등의 단어에는 왼쪽 일반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TV광고에까지 동원된 듀엣 패닉의 ‘왼손잡이’는 소외된 소수로서의 왼손잡이 이미지를 전용,‘문제아’들의 심경을 대변해 인기를 끌었다.“…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나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그런 눈으로 욕하지마/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난 왼손잡이야.”(‘왼손잡이’ 가사중에서)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에 관한한 다른 나라도 이에 못지 않다(박스기사 참조).인터넷의 왼손잡이 페이지(http://www.yahoo.com/ Society_and_Culture/Left_Handers/)에는 이들이 겪는 고통과 그 해소법으로 꽉 차있다. 소수파의 권익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는 선진국의 경우 왼손잡이들이 그들의 불편과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고 그들을 위한 거의 모든 생활용품이 생산되며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를 뿐이다.

연세대 신경정신과 민성길 교수팀이 지난해 발표한 논문 ‘소아의 손잡이와 문제행동’(신경정신의학 제35권 제3호 게재)은 두가지 점에서 주목을 끈다.첫째는 알려진 것보다 한국의 왼손잡이가 서구에 비해 적지 않다는 것이며,둘째는 왼손잡이일수록 문제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조사결과다.서울서대문구에 위치한 4개 초등학교 1~3학년 아동 2천8백52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이 조사에서 비오른손잡이는 전체의 17.3%에 달해 10~13% 정도로 보고되고 있는 미국·캐나다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위축,불안·우울,주의력 결핍,공격행동,비행행동등 5항목에서 비오른손잡이가 오른손잡이에 비해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민성길 교수에 따르면 이 결과는 왼손잡이와 양손잡이가 오른손잡이에 비해 여러가지 질환이나 문제행동이 많다는 서구의 갖가지 연구결과와 일치한다고 한다.그러나 이 결과를 두고 ‘왼손잡이는 역시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성급하다.왜냐하면 이런 수치의 차이가 생물학적(혹은 유전적) 요인인지 사회문화적 요인인지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민교수는 “서구에 비해 왼손잡이에 대한 배려도가 낮은 중국과 한국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가 문제행동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인다.따라서 왼손잡이라고 윽박지르다 보면 평범한 아동도 문제아로 만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소수라는 이유 때문에 왼손잡이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은 상상외로 많다.보통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세상은 오른손잡이 중심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웃옷 주머니,단추의 방향,컴퓨터의 자판과 마우스,자동차 안의 재떨이 위치,문의 손잡이등이 왼손잡이들에게 작은 불편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왼손잡이사랑의 자유게시판에는 볼링장에 갔다가 왼손잡이용 공이 없어 보통 공으로 게임했다가 손가락 껍질이 다 벗겨졌다는 고백도 실려있다.왼손잡이용이 따로 있지만 구하기 힘들어 불편을 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야구글러브.기타등으로 이어진

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왼손잡이=별종'으로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이다.왼손잡이사랑모임의 고광현(27.조흥은행 시스템운영팀)씨는“일상 생활의 불편한 점은 사실 평소에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하지만 '야,너 왼손잡이구

나'라는 말을 할때는 정말 싫다”고 토로한다.

왼손잡이들을 추어주는 속설도 없진 않다.'왼손잡이들은 머리가 좋다'가 대표적이다.세계 천재들의 모임인 멘사 회원 가운데 20%가 왼손잡이며,다빈치.아인슈타인.뉴턴.괴테,그리고 빌 게이츠 같은 당대 최고의 천재들도 왼손잡이라는 사실

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사실 왼손잡이 유명인사는 너무 많아 다 소개하기 힘들 정도다.미켈란젤로.피카소.라파엘로등의 화가,커트 코베인.지미 헨드릭스.폴 매카트니등의 뮤지션,톰 크루즈.니콜 키드먼(부부).로버트 드 니로.마릴린 먼로.브

루스 윌리스등의 영화배우와 다수의 스포츠스타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왼손잡이들을 진정으로 안심시켜주는 것은 몇몇 왼손잡이 영웅이 아니라 사회의 현실적 배려일 것이다.최근'왼손잡이 이야기'(메르헨 간행)를 펴낸 김용운(43)씨는“미국과 캐나다는 많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작은 도시인데도 왼손잡이

용품 가게가 따로 있을 정도로 왼손잡이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한다.

오는 3월9일은'세기의 왼손잡이 부부'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결혼기념일이다.세계의 왼손잡이들은 이날을'결혼하기 가장 좋은 날'로 꼽고 있다.그러나 세계 왼손잡이의 날은 이날이 아니라 8월13일이다.

국제왼손잡이협회를 창립하고 최초의 왼손잡이 신문을 발행한 딘 캠벨이라는 인물의 생일이다.매년 이날이 되면 왼손잡이들은'나는 왼손잡이를 사랑해'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왼손잡이들의 시가행진이 이뤄진다.

그 자신이 왼손잡이인 김용운씨는“이제 한국도 왼손잡이들을 현실적으로 배려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왜냐하면'소수'에 대한 사회적 배려 수준이 선진화의 중요한 척도기 때문”이라는게 그의 부언이다.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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