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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 쓰나미 … 국가 비상경영에 나설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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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백악관과 의회가 자동차 빅3에 150억 달러를 지원키로 한 것은 보호무역주의의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봐야 한다. 당초 지원요청 금액(340억 달러)의 절반 이상을 깎은 것이나, 공적 자금 대신 환경대책기금을 통해 지원하는 것도 눈속임에 불과하다. 오히려 무디스의 마크 잔디 수석이코노미스트가 미 의회 청문회에서 한 증언이 훨씬 현실적이다. 그는 “150억 달러는 향후 1년간 파산을 면하기 위한 것일 뿐 앞으로 최대 125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빅3에 8배 이상의 ‘중도금·잔금’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미국은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공정무역’이란 새로운 표현을 동원해 빅3의 자금 지원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을 깡그리 무시한 조치일 뿐이다. 미국이 이처럼 국가적 차원의 보호무역으로 돌아서면서 자유무역은 껍데기 신세가 됐다. 지난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향후 1년간 보호무역을 동결키로 한 약속은 공염불이 됐다. 누구도 더 이상 보호무역의 금기를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다. 당장 영국부터 대놓고 “국내 자동차 산업을 지키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할 정도다.

우리에게 뼈아픈 대목은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반도체에 보호무역이 집중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 분야는 선진국들이 핵심 전략산업으로 여기는 업종이다. 여기에다 급속히 시황이 악화되는 것도 공통점이다. 미국과 영국의 11월 자동차 판매 대수는 전년 동기 대비 37%가 줄었다. 1930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수치다. 반도체 D램도 연초 대비 판매가격이 60% 가까이 하락했다. JP 모건은 “내년에도 올해만큼 반도체 값이 떨어지면 삼성전자를 빼고 살아남을 업체는 없다”고 전망했다.

보호무역이 기승을 부리면서 시장원리는 증발되고 있다. 대만 정부는 자국의 4개 반도체 업체에 대출 연장과 함께 공적 자금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있다. 독일 정부도 부도 직전의 반도체 업체 키몬다를 지키기 위해 3억 유로를 긴급 지원할 움직임이다. 이처럼 도태돼야 할 한계 업체들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면서 국내 업체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글로벌 구조조정이 지연됨에 따라 치킨게임(적자를 무릅쓰고 상대 업체가 무너질 때까지 생산을 늘리는 경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내 업체들의 체력도 고갈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 우선 WTO를 앞세워 보호무역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지킬 것은 확실하게 지킬 필요가 있다. 외국 업체들이 먼저 ‘전쟁’을 도발한 이상 공세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해외 경쟁기업이 멀쩡히 버티는데 이보다 훨씬 경쟁력이 뛰어난 우리 기업이 도산하는 사태를 방치할 수는 없다. 내부적으로는 노·사·정의 연대가 중요하다. 현대차의 경우 차 한 대를 만드는 시간이 일본의 도요타자동차(22.1시간)는 물론 몰락해가는 GM(22.2시간)보다도 8시간이나 길다. “(현대차는) 일본 차를 좇아가려다 GM을 닮아간다”는 미 뉴스위크지의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지난주 기아차노조가 물량 재배치와 혼류 생산에 합의한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정부가 자동차·반도체 등 9개 주력 업종에 대한 3단계 위기관리 대책을 내놓은 것도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시장 상황을 점검하면서 대응하는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정 기간 소비세를 폐지하거나 연구개발자금을 과감히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장기전을 각오해야 하는 만큼 지금부터라도 국가 차원의 비상경영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