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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사람들 “한·미 FTA 쉽사리 진전되지 않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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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한나라당 대표단이 1~7일 미국 워싱턴DC와 뉴욕을 방문했다. ‘오바마 체제’ 출범을 맞아 미국 대외정책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한·미 관계 강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한국 집권여당의 대표선수들이 새로운 미국을 이끌 실세 참모들을 만나러 간 셈이다. 대표단 중 한 명인 홍정욱(38) 의원이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얘기들을 정리해 중앙SUNDAY에 보내왔다. 오바마 시대의 한·미 관계를 전망하는 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은 홍 의원의 체험기.

한나라당 대표단이 2일 게리 애커먼 하원의원을 만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김장수·전여옥·애커먼·정몽준·홍정욱 의원. 아래 사진은 4일 헨리 키신저와의 만남.

세계사의 희비(喜悲)가 일상에 투영된 잊지 못할 순간들이 있다. 천안문 광장, 베를린 장벽,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인류사의 영욕이 눈앞에 펼쳐지던 그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지난 11월 5일, 나는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지켜보며 또 하나의 찰나를 내 기억의 보고에 담았다. 편견의 벽을 넘어 ‘분노하는 선동가’가 아닌 ‘희망을 파는 지도자’로 우뚝 선 오바마. 그의 당선은 분명 ‘쇠락하는 초강대국’이란 오명에 짓눌려온 미국이 이끌어낸 역사의 진화였다.

그러나 오바마의 당선은 우리에게 중대한 외교적 난제이기도 했다. 연방정치 경력이 2년에 불과한 그가 주도해갈 미국의 변화를 쉽사리 예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풀지 못한 북핵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현안에 대해 오바마는 어떤 해답을 내놓을 것인가. 내가 정몽준·전여옥·김장수 의원과 함께 미국에 온 것은 이 같은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9년 만에 다시 찾은 뉴욕, 유학 시절 정겹게만 느껴졌던 이 도시가 그렇게 커 보일 줄은 몰랐다.

“힐러리가 FTA 우군 될 것”

2일 아침, 잠을 설쳐 초췌한 모습으로 게리 애커먼 민주당 하원의원을 만났다. 양복 상의에 자신의 상징인 흰 카네이션을 꽂은 채 나타난 그는 한·미 FTA를 지지하는 14선의 거물이다. 그에게 미 의회에서 한·미 FTA 비준이 지연되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미국·콜롬비아 FTA를 비준하라는 부시 대통령의 강압적 요구가 의회의 자존심을 건드린 탓이란다. 가장 먼저 비준돼야 할 FTA가 유보되면서 다른 FTA 비준도 함께 미뤄졌다는 것이다.

오바마가 선거운동 당시 FTA를 비판했던 사실을 거론하며 정책 기조가 보호무역으로 흐르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표명했다. 그러자 애커먼은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의 일화를 소개했다. 보수적인 존슨이 취임 후 진보적인 인권법안을 추진하자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그러자 존슨이 답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나는 정치인이었다.” 후보와 대통령은 다르다는 의미였다. 애커먼은 ‘Blue Dogs’라 불리는 중도파 민주당 의원들과 국무장관에 내정된 힐러리 클린턴이 한·미 FTA의 우군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초유의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오바마 정부가 한·미 FTA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있을까. 대선 기간 줄곧 보호무역을 강조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입장을 쉽사리 바꿀 수 있을까. 더구나 한번도 FTA를 선(先) 비준한 적 없는 미국이 한·미 FTA를 먼저 비준할 리는 없었다. 이는 힘의 역학이 작용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기도 했다. 한·미 FTA에 대해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 애커먼조차 한·미 FTA를 포함한 한국 문제가 오바마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애커먼과의 회동을 마치고 서둘러 달려간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회의에선 북한 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대북정책을 담당했던 미국의 관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오바마가 한반도 정책을 자문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 빅터 차 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국장, 윈스턴 로드 전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등이 자리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대사의 모습도 보였다.

북한 문제는 미국에도 복잡한 숙제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인가. 포기한다면 어떻게 검증할 것이며,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압박할 것인가. 오바마 정부는 어떻게 북한을 다룰 것인가. ‘통미봉남’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미 간 ‘찰떡’ 공조는 앞으로도 가능할까. 김정일 사망 등 북한의 급변사태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북한 문제에 대한 한 치의 양보 없는 설전이 이어졌다. 문제는 상대가 배수진을 친 협상의 달인이란 점이다. 쓸 만한 채찍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클린턴도, 부시도 줄곧 끌려다녔고 6자회담도 북한의 의도대로 변질돼 왔다. 한국의 역할도 극히 제한돼 있다. 결국 열쇠는 미국이 북핵 폐기에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날도 새벽에 잠이 깼다. 시차 탓도 있지만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와 조찬을 나눈다는 설렘도 없지 않았다. 하버드가 낳은 3대 천재 경제학자라는 평을 들으며 26세의 나이에 정교수가 된 그다. 삭스는 대학 후배라는 내 인사에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경제위기와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한·미 FTA에 대해 “쉽사리 진전되진 않을 것이며, 비준하려면 미국 자동차 산업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고, 경제 침체에 대해서도 “2년가량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개방을 진두지휘했던 그의 조언을 가볍게 흘려들을 순 없었다. 조찬을 마치고 일어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뉴욕의 마지막 일정은 오바마의 애독서로 알려진 『흔들리는 세계의 축』의 저자 파리드 자카리아 뉴스위크 편집장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오바마가 일각의 우려와 달리 자유무역을 지지할 것이며 북핵에 관해서도 ‘현실적인’ 시각을 견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한반도가 오바마의 정책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을 방관하는 사이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해내고 핵무기 개수를 늘려 왔다. 그런데 북핵 문제가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또다시 방치된다면 어떤 문제가 벌어질 것인가.

키신저 “북핵, 한·미가 中 설득해야”

권력의 중심인 워싱턴DC에서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 등을 만났다. 핵심은 키신저와의 만남이었다. 경륜의 정점은 문제를 단순화하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신저의 해법은 압권이었다. 그는 “빈을 정복하려면 빈을 공격하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하며 정공법을 쓸 것을 주문했다. 핵 보유를 용인하는 어정쩡한 해법은 정답이 아니며, 검증 등 기술적 문제로 입씨름을 벌이는 것 또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한·미 양국이 중국을 설득해 북한의 핵을 완전히 없애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브루킹스연구소와 헤리티지재단도 방문해 오바마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가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도 대부분 한·미 FTA와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예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50여 명의 정치인·관료·전문가를 만났지만 명쾌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한반도 문제는 오바마 정부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바마의 한반도 정책이 어떤 색채를 띨지 예단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우리 입맛대로 그려질 것이라는 기대는 헛되어 보였다. 이는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방미단을 이끈 정몽준 의원 역시 “한국이 미국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애커먼 의원은 오바마 정부의 외교정책을 논하며 ‘삐걱대는 바퀴에 기름을 바른다’는 표현을 썼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맥락이었다. 좋든 싫든 미국은 21세기의 패권국가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미 FTA 비준은 미국의 적극적 관심과 참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와 외교적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런 미국에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고 ‘찰떡’ 공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

외교는 ‘평화의 탈을 쓴 전쟁’이다. 승리는 차치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소모된다. 더욱이 격동의 한반도에 둥지를 튼 우리에게 외교는 유일한 생존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노력이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부터라도 장기적인 시각과 치밀한 전략 아래 전례 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쟁을 초월한 외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세계사의 희비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마련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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