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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밥퍼! 맘퍼! 꿈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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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밥 굶는 사람 없게 하겠다”는 ‘밥퍼’운동이 시작된 지 20년이 됐다. 1988년 겨울에 청량리 역전에서 당시 젊은 전도사였던 최일도 목사에 의해 시작된 ‘밥퍼’운동. 처음에는 무의탁노인, 행려인, 노숙인들에게 라면을 끓여 먹였다. 라면이 밥으로 바뀌는 데 3년이 걸렸다. 청량리역 주변 야채시장 쓰레기더미와 근처 쌍굴다리를 전전하던 ‘밥퍼’가 비바람을 피해 급식할 수 있기까지 14년이 걸렸다. 밥퍼의 진가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 빛났다. 그리고 10년 후 지금 전국으로 퍼진 ‘밥퍼’는 없는 이들을 버티게 하는 마지노선이 됐다. 밥퍼!

# 하지만 입에 풀칠하고 포도청이던 목구멍에 뭐라도 삼켜 위를 불리고 장을 채우고 나면 끝이 아니다. 메우고 채워도 어찌할 수 없는 텅 빈 허전함과 허탈감. 그 내몰린 마음을 추스를 길 없어 차라리 매서운 찬바람 속에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 얼마 전 한 영화사에서는 투자 부문의 임원급 3명을 제외한 제작과 마케팅 부문의 인원 전부가 회사를 떠나도록 통보받았다. 떠밀린 사람들은 달랑 두 달치 월급을 받고 회사 문을 나서야 했다. 최근 SC제일은행이 희망퇴직을 통해 190여 명의 임직원을 떠나보냈고, 씨티은행도 전체 직원의 절반인 1700여 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이제 또 시작인 것이다.

# 10년 전 사람들이 내몰릴 때는 서로 안타까워하며 남의 일처럼 보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런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10년 전 ‘눈물의 비디오’에서 본 것처럼 먼저 떠나는 동료를 배려하고 마음 아파하며 남은 이들에겐 다시 회사를 살려달라는 눈물의 호소를 할 만한 서로의 여유조차 없어졌다. 사실 떠밀리고 떠나는 것도 서운하지만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는 것이 더 아쉽고 가슴 아픈 법. 그러니 힘들고 각박할수록 서로에게 마음이라도 퍼주자. 맘퍼!

# ‘눈물의 비디오’에는 당시 제일은행 테헤란로 지점에서 일하던 이삼억 차장이 등장한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 그리고 유치원 다니던 막내를 아침식탁에서 바라보며 얘들이 대학갈 때까지만 버티면 좋겠다고 혼자 애달파하던 그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2000년 췌장암으로 45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이미 고인이 된 이 차장의 아이들도 모두 자라 첫째와 둘째 아이는 이미 대학생이 됐을 나이다. 그의 소박한 바람대로 아이들은 대학에 갔을까? 죽어서라도 그의 꿈은 이뤄졌을까?

 #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귀퉁이에서 시래기 파는 박부자 할머니가 대통령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자, 그 할머니에게 대통령은 20년을 매 온 목도리를 줬다. 하지만 대통령은 목도리가 아니라 견디고 살아낼 꿈을 퍼줘야 했다. 박부자 할머니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꿈퍼’를 해야 한다. 지금을 이 악물고 이겨내면 잘 살 수 있다는 꿈. 내 아이가 대학 갈 때까지는 일할 수 있다는 꿈. 그 소박한 꿈들이 이 세찬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아 봄꽃을 피울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의 존재이유다. 꿈퍼!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