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3김체제와 어둠의 자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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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민회의 정동영(鄭東泳)대변인은“정부가 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의 망명을 한보게이트로 몰린 궁지 탈피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정부.여당을 공격했었다.

광화문께 있는 정치 화제가 자주 만발하는 한 커피숍에서 이곳 단골 한 사람은 이 신문기사를 읽곤 용수철에서 퉁겨나오듯 말을 뱉었다.“국민회의도 黃비서 망명이 한보사태 구덩이를 덮어버려주기 바라는 거야.안 그러면 자기들도 그 속으로 빠지고 말게 됐거든.여당에 대한 공격은 그 덮은 흙 위에 안전하게 서서 하자는 거지.”검찰이 한보수사를 사실상 종결했다는 보도도 바로 그 신문에 실려 있었다.

黃비서로 한보를 덮을 수는 없다.黃비서가 막는 것은 적(赤)이다.黃의 망명사건은 남한의 좌파 적색 프락치들이 학생과 노동조합에 섞여들 수 없도록 숨통을 틀어막는데는 큰 힘이 될 것이다.그 덕에 오히려 온건 우파 국민은'3金체제 부패'를 안심하고 때리고 부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다.黃비서가 북한 정치의 실패라면 한보는 남한 정치의 실패다.북한의 초라한 실패를 가지고 남한의 화려한 실패를 번듯하게 가릴 수는 없다.

검찰 수사가 사실상 막을 내린 다음 역설적으로 한보사건의 어둠은 훨씬 선명하게 그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고 있다.한보 당진제철소에 지금까지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돈은 70억달러다.세상에는'통박'이란 것이 있고 공사비 산정에는 국제적 표준단가가 있다.첫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랑나르 프리시는 자주 말했다.경제학자는 모를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먼저 공학자에게 물어봐야 한다고.내가 만난 몇 공학자들의 국제적 표준설비비에 따른'통박'셈에 의하면 한보 당진제철소에 든 돈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50억달러가 상한이라는 것이었다.

자,그러면 나머지 20억달러,즉 1조7천억원은 어디 갔는가.여태까지 이 사건으로 검찰이 잡아들인 사람들이 분 부정한 돈 주고 받은 총액수는 21억원이다.행방불명되고 만 돈의 겨우 0.1%강만 밝혀진 것이다.어둠의 실체를 더욱 뚜렷이 하기에는 빛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검찰이 1천 가운데 하나만 밝혔기에 남은 9백99배의 어둠을 국민은 오히려 너무도 크고 뚜렷이 볼 수 있게 됐다.그 어둠 속에 검찰 수사마저'금액상'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는 것도 국민은 뚜렷이 보고 있다.검찰도 공학자에게 먼저 물어보고 이번 수사의 범위를 챙겼어야 했다.

한보사건은 우리 국민에게 내린 신(神)의 도괴(倒壞)와 폭발사고를 통한 경고 계시(啓示)시리즈의 마지막 회인 것같다.다음 회가 있다면 그것은 경고가 아닌 대란(大亂) 자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黃비서 사건은 북한에는 이미 그들의 대란이 진행중임을 보여준다). 한보사건이 경고한 것은 그 대상이 정치다.국민은 다음과 같은 확신성 의혹을 갖게 됐다.

첫째,김영삼(金泳三)정부는 부패의 규모에서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권을 능가했을 가능성이 있다.'3金'이란 말로 대표되는 보스 독재 정당체제를 유지하는 한 누구를,아무리 민주적으로 대통령으로 뽑아도 법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민주주의를 만들 수는 없다.

둘째,은행장은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치권력이 임명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에 증명됐다.은행장을 경영의 논리에 따라 자본의 권력이 임명하지 않으면 경제 망하고,은행 망하고,예금자 망하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이들이 망하면 국민인 납세자가 그 돈을 물 수밖에 없다.

셋째,독선적 권력은 검찰이 촛불이나 손전등 수준의 용기나 지혜로 밝혀낼 수 없는 칠칠찮은'어둠'의 가신(家臣)과 자식들을 데리고 살러 들어 올 가능성이 크다.이들의 비공식적 권력은 부패를 공식화한다.

자,이제 이 사건은 검찰을 떠나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하회만 기다리고 있기보다 국민은 앞장서서 다그쳐야 할 때다.진정한 민주주의 개혁은 국민이 만드는 압력만이 해내게 될 것이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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