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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황장엽 망명이 뜻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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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황장엽(黃長燁) 북한 노동당비서의 망명은 그럭저럭 버텨나갈 것으로 예상되던 북한체제의 위험수위가 북한권력 핵심인사도 느낄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증거다.황장엽은 북한체제를 운영하는 주체인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로서 외교부의 대외 활동을 감찰하는 당 국제부와 그 부장보다도 윗자리에 있는 인물이다.이런 점에서 그의 망명은 가위 충격적이다.
황장엽이 왜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그의 최근 행각부터 살펴봐야 한다.황장엽은 최근 세미나 참석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대남(對南)비서 김용순(金容淳) 대신 그가 일본 방문길에 오르자 북한의 대일(對日)정책방향이 종래의 대남노선의 일환에서 본격적인 수교추진으로 전환했다는 분석이 여기저기서 제기됐다.대일관계 개선은 궁핍에 허덕이는 북한경제에.과거보상금'이라는 긴급수혈을 제공할뿐 아니라 일본자본 유치로 북한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의 꿈을 현실로 바꿔줄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일본정부와 대일수교회담 재개라는 합의만 유도해냈어도 그의 방일목적은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그러나 때마침 터져나온 북한의 일본여학생 납치사건으로 목적달성은커녕 생일을 며칠앞둔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리게 됐다.대외정책 핵 심인사로서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지 못했다는 비난 역시 피할 길이 없게 된 것이다.
이같은 최근 그의 행각이 말해주는 것 외에도 황장엽의 망명은의미하는 바 크다.먼저 김정일의 권력기반이 약화됐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점이다.김정일(金正日)의 스승으로 김정일이 권력을 잡고 있는한 호의호 식이 보장돼 있는 그가.배가 고파'남한에 왔을리는 만무하다.그렇다면 반(反)김정일세력이 존재해 이미 행동에 옮길 단계에 이르렀다는 단서를 포착하고 이를 막을 길이 없다는 판단에 망명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대외적으로 북한을 장악한 것 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권력이 모래성에 불과하며 실세그룹이 따로 존재해 황장엽을 제거할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이 감지된 때문일 수도 있다.또 권력투쟁에서 김정일 친위그룹에 밀려 망명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그것도아니면 단순히 김정일 생일행사를 원만히 꾸릴만한 엔화를 마련치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자세한 망명동기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북한체제의 실질적 운영원리랄 수 있는 주체사상의 대부(代父)인 황장엽의 망명은 위기에봉착한 북한경제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제한적이나마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그는 과 거 중국을 방문했을 때 사회주의의 실패를 실감하고 허무한 심정을 자주 표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어쩌면 황장엽의 망명은 밀려오는 자본주의의 물결속에 힘없이 스러져갈 주체사상의 종말을 막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황장엽의 망명은 남북관계를 또다시 경색시킬 것으로 보인다.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납치'로 우기고.즉시 송환'.백배천배의 보복불사'운운하면서 한동안 으르렁거릴 것이 뻔하다.황장엽의 정치적 비중으로 보아 도발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부각 시키면서 우리를 위협할 것이 확실하다.북한당국이 느끼는 당혹감(當惑感)을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황장엽의 망명에 집착한 나머지 실익(實益)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북한에선 잠수함사건으로 한동안 연기됐던 경수로건설 부지조사작업이 진행중이고,남한에서도 북한이 요청해 올 경우 식량지원과 경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앞으로 더 이상의 망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 한의 인식은보다 전향적(前向的)으로 전환돼야 할 것이다.
김용호 민족통일硏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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