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 서희경을 깨운 첫 승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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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게 단순히 유리구두 덕분이었을까. 유리구두에 딱 맞는 발을 가진 아가씨가 신데렐라 말고는 없었을까. 신데렐라가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마음씨가 곱지 않았더라면 유리구두의 마법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올해 한국여자골프(KLPGA) 투어에서 6승을 거두며 ‘신데렐라’로 떠오른 서희경(22). 프로 데뷔 3년을 맞도록 우승은커녕 톱10 진입도 쉽지 않았던 선수가 하반기 석 달 만에 6승을 거둔 것을 ‘챔피언 재킷의 마법’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챔피언 재킷의 마법’ 스토리는 레이크사이드 여자오픈이 끝난 7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희경은 이날 대회장 인근의 한 음식점에서 우승자인 홍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란아, 축하해. 벌써 2승이네.”

2006년 KLPGA투어에 데뷔한 서희경은 홍란과 고교 동기생. 스물두 살(1986년생) 동갑내기인 두 선수는 지난해까지 1승도 거두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 3년째를 맞는 올해 들어 희비가 엇갈렸다. 홍란이 2승을 거두는 동안 서희경은 여전히 무명의 그늘에 머물러 있었다.

“희경아, 너 그거 아니. 내가 5월에 우승했던 (김)보경이 챔피언 재킷을 입어 보고 난 뒤 우승했잖아.”

“정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네 챔피언 재킷 좀 입어 볼 수 있을까.”

홍란이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서희경은 빼앗듯이 챔피언 재킷을 걸쳐 입었다. 그
러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 옷을 입고 음식점 주위를 돌아다녔다. 서희경은 “당시엔 ‘우승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인들 못 하랴’ 하는 심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정말로 마법처럼 챔피언 재킷의 효력이 나타났다. 한 달여 만에 열린 하이원컵 SBS 채리티 여자오픈. 하반기 첫 대회였다. 서희경은 8월 말 열린 이 대회에서 1라운드부터 줄곧 선두를 달린 끝에 꿈에 그리던 챔피언 재킷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첫날 선두에 나섰을 때만 해도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한번 깜짝 선두에 나섰겠거니’ 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1라운드를 마친 뒤 공식 인터뷰를 하기 위해 프레스센터에 들어선 서희경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최종 3라운드 막판엔 잇따라 보기를 쏟아 내며 역전의 위기까지 몰렸다. 긴장한 탓에 벌벌 떠는 모습이 확연했다. 그래도 그는 그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마지막 날 동반 라운드한 신지애(20)가 서희경을 다독거리지 않았더라면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경기였다. 이때만 해도 서희경은 여리디 여린, 흔히 말하는 ‘멘털을 많이 타는’ 대표적 선수였다.

하지만 그 첫 승과 함께 서희경은 다시 태어났다. 그 다음 주에 열린 KB국민은행 3차 대회에서 그는 줄곧 선두를 달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챔피언 재킷의 마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희경은 그 다음 주 중국에서 열린 빈하이 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3주 연속 우승. 국내 선수 가운데 3주 연속 우승은 박세리(31)·김미현(31) 이후 서희경이 처음이었다. 10년 만에 나온 값진 기록이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2승을 거뒀던) KB국민은행 3차 대회 전날 아빠가 꿈을 꾸셨대요. 우승 세리머니로 갤러리에게 공을 던졌는데 그 공이 클럽하우스 유리창을 깼다는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네 개의 공을 던져 유리창 네 개를 깨뜨렸다는 거지요. 그래서 ‘잘하면 올해 4승은 거두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서희경은 10월 가비아 인터불고 마스터스에서 또다시 우승했다. 시즌 4승. 아버지의 꿈이 들어맞는 듯했다. 그러나 11월에 열린 세인트포 레이디스 마스터스에서 그 꿈은 틀린(?) 것으로 판명 났다. 유럽여자투어(LET)를 겸한 이 대회에서 서희경은 또다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이다. 그러곤 시즌 마지막 대회인 ADT캡스 챔피언십까지 휩쓸어 버렸다. 프로 3년째를 맞도록 1승도 거두지 못했던 그가 8월 말부터 11월까지 3개월 동안 6승을 거둔 것이다. 재투성이 소녀가 화려한 궁궐의 안주인이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버금가는 인생 반전 아닌가.

다시 유리구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신데렐라의 이복 언니들은 유리구두를 신어 보려 했지만 발에 맞지 않았다. 억지로 끼워 맞춰 신었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유리구두 덕분에 왕자가 신데렐라를 찾은 건 사실이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은 건 신데렐라 자신의 매력 덕분이었다.

서희경의 6승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챔피언 재킷이 그에게 첫 승을 안겨준 심리적 지지대 역할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 후의 5승은 서희경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다. 서희경이 우승할 때마다 그에게 챔피언 재킷을 빌려 입어 봤다는 선수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챔피언 재킷의 마법을 경험하지 못했다.


서희경이 첫 우승을 거두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쏟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함께 훈련하던 홍진주(25)가 2006년 코오롱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데 이어 올해 초 단짝인 홍란마저 우승하자 서희경은 극도의 무기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하반기 대회가 시작되기 전 후배인 신지애의 캠프를 찾아간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국내 여자투어를 휩쓸고 있는 그에게서 어떻게 하면 우승할 수 있는지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전남 광주에서 1주일간 합숙 훈련을 했다.

“신지애 프로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어요. 저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신 프로의 집중력은 정말 놀랍더군요. 테크닉 면에서 배운 건 별로 없지만 하루 종일 그가 퍼팅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연습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지애를 만난 뒤 서희경의 샷이 비로소 눈을 뜬 셈이다. 그를 지도하는 고덕호 프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전에도 서희경의 샷은 훌륭했지만 뭔지 모를 1%가 모자랐던 거지요. 샷은 좋은데 마지막 한 고비를 넘지 못해 좌절했던 거고요. 그런데 신지애와 훈련을 함께한 뒤 샷이 업그레이드됐다고 할까요.”

몸을 숙여 후배로부터 얻은 깨달음이 그의 첫 승을 가져왔다는 해석이다.

서희경은 원래 성격이 무척 여린 선수다. 평소엔 드라이브샷 거리가 260야드를 넘나들다가도 정작 대회에만 나가면 긴장한 탓에 거리가 20~30야드씩 줄어들곤 했다. 실수할 때마다 감정 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운스윙 때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가는 탓에 미스 샷을 하기 다반사였다.

그러나 1승을 거두고 난 뒤 서희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10월 가비아 인터불고 대회에 이어 11월 두 차례 대회에서도 모두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를 일궈 냈다. 세인트포 마스터스 마지막 날 6언더파, ADT캡스 대회 최종 라운드에선 생애 베스트인 8언더파를 몰아쳤다.

특히 시즌 막판 최종 라운드에 나선 그는 예전의 서희경이 아니었다. 선두와 타수 차가 벌어질 때마다 조바심을 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고, 필요할 때는 상대를 압박할 줄도 알았다. 신들린 듯한 퍼팅도 돋보였다. 까다로운 그린에서도 5m가 넘는 먼 거리의 퍼팅을 쏙쏙 집어넣었다. 그의 플레이를 지켜본 베테랑 정일미(36) 프로는 “어린 선수가 퍼팅 브레이크를 기가 막히게 읽더라. 먼
거리의 퍼팅을 쏙쏙 집어넣는데 당할 선수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서희경은 키도 크고, 몸매도 늘씬하다. 덕분에 서희경의 이름 앞에는 ‘필드의 수퍼모델’이란 별명이 붙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마음씨도 곱다는 평을 듣는다. 우승한 뒤에는 반드시 후배와 동료를 불러 모아 한턱을 낸다.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르며 큰돈을 벌었지만 행동거지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런 성격이 골프에는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골프를 잘하려면 때로는 영악스러워야 하고, 필요할 때는 야멸치게 몰아붙일 줄도 알아야 하는데 서희경에겐 이런 독기가 없다는 것이다. 롱런하기 위해 체력도 보강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체력이 떨어져 시즌 초에 비해 드라이브샷 거리가 20야드 이상 줄었는데, 이래선 미국이나 일본 무대에선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희경의 잠재력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더 많다. 무엇보다 우승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자신감은 우승을 해 보지 못한 이는 갖기 힘든 소중한 자산이다. 옆에서 한마디만 해 주면 스스로 샷을 교정할 줄 아는 것도 예전과 달
라진 점이다. 내년 시즌에도 그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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