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85>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0호 16면

26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팀을 이끌어 갈 코칭스태프가 선임됐다. 김인식 감독과 6명의 코치. 올림픽 금메달 팀, 세계 정상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의 지도자들이다. 그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대단하다. 김성한 수석코치, 이순철 타격코치, 양상문 투수코치는 고교 시절부터 ‘초(超)’라는 접두사를 달고 다닌 스타 출신이다. 류중일 3루코치, 강성우 배터리코치도 그렇다. 청소년대표를 거쳤고 자타 공인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였다. 야구를 알 때도, 야구를 할 때도, 야구를 가르칠 때도 모두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지 않았다.

연습생 출신 김민호의 성공시대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름이 하나 있다. 1루코치 김민호(두산)다. 김민호 코치는 고교(경주고)를 졸업할 때 간신히 대학(계명대)에 턱걸이해 야구를 계속했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지명을 받지 못해 연습생으로 프로에 발을 디뎠다. 단돈 1000만원(?)을 받고 두산의 전신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아니, 입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장종훈(당시 빙그레)의 연습생 신화가 홈런왕이라는 멋스러운 옷을 입고 찬란히 빛난 반면 수비 위주 유격수 김민호의 현역은 담담했다. 93년 프로가 된 그는 95년 한국시리즈에서 MVP로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역 시절을 수비력에 의존해 보냈고 허리 부상으로 2003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넘겨받은 주인공은 또 다른 연습생 손시헌이었다.

그는 연습생 출신이었지만 코치로서 그에게는 연습이 없었다. 그는 손시헌·나주환(현 SK)·이대수·김재호를 당당한 주전급으로 키워 냈다. 김경문 감독을 보조해 두산을 꾸준한 강호로 이끌었다. 그리고 코치가 된 지 5년 만에 국가대표 코치가 됐다. 맨 꼭대기까지 간 셈이다.

무엇이 그를 성공한 지도자, 유능한 지도자로 인정받게 했을까. 실패의 경험, 좌절의 시련을 통해 다진 탄탄한 소신이라고 본다. 2004년 한 언론에서 진행한 ‘나의 포스트시즌’이란 코너에 그는 이렇게 썼다.

93년 연습생으로 OB에 입단한 나는 그해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 선발 출장하는 행운을 얻었다. 신인으로 그렇게 큰 무대에 서자 너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1차전에서 박종호의 타구를 멈칫하다가 내야안타를 만들어 주는 등 결정적 실책 2개를 저질러 역적이 됐고 3차전에서도 송구홍의 땅볼을 가랑이 사이로 빠뜨리고 말았다. 결국 OB는 내 실책이 빌미가 돼 LG에 1승2패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당시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올해 두산 나주환이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실책을 하고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면서 당시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중략) 돌이켜보면 포스트시즌 첫 무대였던 93년의 뼈아픈 기억이 한결 나를 단단하게 해 95년 MVP라는 영광의 발판이 됐던 것 같다. 나주환도 실책을 경험 삼아 더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2007, 2008년 김민호 코치가 속한 두산을 꺾고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에 선 SK의 주전 유격수는 다름아닌 나주환이다. 김민호는 연습생 출신이기에 연습생 손시헌의 마음을 더 잘 헤아렸고 실패의 쓴맛을 알기에 한때 풀이 죽었던 나주환의 성장을 예견할 수 있었으리라. 연습생 출신 지도자 김민호에게 출신성분의 걸림돌은 없다. 그의 성공가도를 주목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