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폭풍’과 원화의 추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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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호 30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동시 불황’ 국면으로 몰아넣으면서 그 회오리바람이 신흥경제권 국가들에 거센 통화 폭풍을 안기고 있다. 러시아·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 멕시코·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 한국·인도네시아·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통화들이 지역과 나라를 가리지 않고 악몽 같은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의 방파제도,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달러 융통도,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도 무용지물이다. 핫머니가 신흥경제권을 일제히 탈출하고, 엔캐리 자금이 고향으로 돌아가고(carry yen back), 신흥경제권의 수출 전망까지 어두워지면서 통화 가치 하락이 거의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의 ‘통화 위기의 결정판(The mother of all currency crises)’이라는 수사가 엉뚱하지 않다. 종전에는 아시아 위기, 중남미 위기 등 지역 위기로 불렸지만 지금은 모두의 글로벌 위기라는 얘기다.

앞으로 본격적인 통화 폭풍의 눈은 유럽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서유럽의 주요 은행들이 동유럽과 중남미·아시아 국가들에 물려 있는 대출은 4조7000억 달러에 이른다. 오스트리아 은행들은 오스트리아 국내총생산(GDP)의 85%에 상당한 돈을 헝가리·우크라이나·세르비아·벨로루시 등에 빌려 줬다. 이들 국가는 하나같이 IMF 구제금융 창구를 들락거리고 있다.

스페인 은행들의 아르헨티나·브라질 등 남미 국가 대출 잔액은 3160억 달러로 미국(1720억 달러)의 배에 가깝다. 엔캐리 자금으로 주택 모기지대출 붐을 일으켰던 헝가리와 라트비아는 엔화 환율이 40% 폭등해 아우성이다.

달러화 대안으로 주목받던 유로화도 위기에 휩싸이며 통화의 ‘안전한 피난처’는 달러와 엔화밖에 없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모건스탠리의 통화 전문가들은 모든 통화가 달러에 대해 약세를 보일 것이며, 달러에 대한 신흥국의 통화 가치는 지금 수준에서 20~30%까지 더 떨어진다는 예상까지 내놓고 있다.

금융위기의 주범인 미국의 달러화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까닭은 전문가들도 헷갈린다. 분명한 사실은 글로벌 달러 부족 현상이다. 세계 경기 위축으로 수출이 줄고, 신용경색과 차입 축소로 자본 유입이 격감하면서 빌려 쓴 돈의 만기 연장마저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유럽의 경제 후퇴로 ‘위기 때는 역시 달러’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지난 6년여 동안 달러 대신 유로 등 다른 통화로 다변화해 온 외화 자산 구성이 달러 쪽으로 급선회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미국과의 달러 무제한 스와프 등 선진 7개국(G7)의 국제 공조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축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도 달러에 보이지 않는 힘을 실어 주고 있다.

골드먼삭스는 얼마 전 아시아 지역에서 호주와 한국·인도네시아·인도 4개국을 통화 폭풍 경보 지역으로 지목했다. 호주는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는 데다 은행 예금에 대한 대출 비율이 140%라는 이유에서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도 은행 예금에 대한 대출 비율이 각각 136%, 95%다. 인도는 급속히 재정적자가 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홍콩은 달러와의 가치 고정으로, 중국은 엄격한 자본 통제로 달러에 대해 ‘나 홀로’ 절상을 견지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대만도 태풍권 바깥이다.

외환보유대국 러시아·인도·한국이 자국 통화 가치를 방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외환보유액의 상당 부분이 쉽게 헐어 쓸 수 없는 비유동성 자산이거나 팔면 손실이 커 손대기 어려운 자산일 가능성도 있다. 정책 당국이 글로벌 불황 쇼크에 대비해 통화 가치 절하를 내심 방치하거나 아니면 방어가 불가항력적이어서 이도 저도 못하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신흥국들의 성장은 글로벌 붐과 값싼 신용의 산물이었다. 세계 경제가 동시 불황에 빠지고 자본 유입이 격감하면 이들 경제도 나빠지면서 통화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이 괜찮다 해도 글로벌 경제의 펀더멘털이 나빠지는 게 문제다. 10년 전 외환위기에서 한국이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글로벌 활황과 저환율로 1998~99년 경상수지가 흑자로 대반전한 덕분이었다. 당분간 이런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원화 가치의 폭락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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