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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존엄사’ 첫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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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회생이 불가능한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게 치료 중지를 허용하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존엄사’를 인정한 첫 판결이다.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김천수 부장판사)는 28일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 김모(76·여)씨와 가족이 “인공호흡기 사용을 중단해 달라”며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운영하는 연세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김씨가 현재 회생할 가능성이 없고, 평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한다는 뜻을 밝혀 온 점이 인정된다”며 “병원은 원고인 김씨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헌법 10조가 보장하는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는 자기 운명결정권이 전제돼 있다”며 “이는 자기의 생명과 신체 기능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함한다”고 밝혔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기초해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의식 불명인 김씨에겐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로 ▶남편의 임종 때 생명 연장을 위한 기관절개술을 거부하며 “내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호흡기는 끼우지 말라”고 말했고 ▶평소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를 보고 “남에게 누를 끼치고 살고 싶지 않다”고 밝혔던 점을 내세웠다.

재판부는 “서면 등의 의사표시가 없어도 평소의 가족·친구에 대한 의사 표현, 종교관, 생활태도, 건강 상태로 치료 중단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3~4개월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의 감정 결과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특히 “의학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생명연장 치료가 환자에게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무의미한 연장을 강요해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인격적 가치를 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경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더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그러나 김씨 가족 명의로 낸 치료 중단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치료 중단은 본인의 결정이지 가족의 의사와는 상관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2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하던 중 저산소증에 의해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의식을 잃고 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는 김씨의 가족은 치료 중단을 요구했으나 병원이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연세대 측이 항소하지 않을 경우 인공호흡기가 제거된다. 병원 측은 “법원의 판결문이 송달되면 논의를 거쳐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고 직후 김천수 부장판사는 “의사의 치료 중단 의무가 인정되는 요건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확산되고 구체적인 입법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법조계·의료계는 “존엄사 도입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튼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장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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