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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조원 어디 쓸까 與野政 치열한 전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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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20면

국회 예결특위의 2009년도 예산안 심사가 19일 시작됐다. 의원들이 국회 예결위 회의장에서 정책질의를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283조8000억원. 정부가 7일 국회에 제출한 ‘2009년도 수정예산안’ 규모다. 원래 예산안보다 10조원 증액됐다. 천문학적 숫자가 멀게만 느껴지지만 나라 살림도 집안 살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규모와 영향력이 크다 보니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제도적 장치가 정교할 뿐이다.

정부는 주부, 국회는 가족회의

19일 오전 10시40분 국회 본청 제2회의장. 국회 예산결산특위가 2009년도 예산안 첫 심사를 시작했다. 이한구 예결위원장 오른쪽엔 한승수 국무총리,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등 장·차관과 부처 직원들이, 왼쪽엔 예결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자리 잡았다.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질의를 하면 국무위원들이 답을 한다. 주부가 내년 살림 계획을 짜 오면 가족회의에서 검토하는 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대통령중심제이지만 의회가 예산 편성권까지 가지고 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총괄해야 한다는 논리다. 우리는 민주화 역사가 짧아 국회의 권한이 축소됐다는 비판도 있지만 ‘정부 편성-국회 심의’ 방식의 장점도 있다. 우선 예산을 직접 집행하는 정부가 현장 상황에 맞게 예산안을 편성할 수 있다. 선심성 예산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도 대선 당시 ‘포크 배럴(pork barrel선심성 예산을 뜻하는 정치용어)’ 논쟁에 휘말릴 만큼 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 위주로 예산을 편성하는 관행이 굳어져 있다.

우리 국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19일 예결위에서도 “부산에 학생문화회관을 설립해 달라”(한나라당 박민식 의원, 부산 강서갑), “대관령 쪽 사업을 챙겨 달라”(민주당 이광재 의원, 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는 등 지역 민원성 발언이 빠지지 않았다. 돈을 타 가야 하는 입장인 정부로서는 예결위 의원들의 발언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8대 국회 첫 상임위를 배정할 때 한나라당 원내 지도부가 비인기 상임위에 배정된 의원들에겐 예결위를 겸임하도록 ‘배려’해 불만을 달랜 것도 ‘예결위 파워’를 짐작하게 한다. 예결위 소속 의원끼리 예산액을 구체적으로 조정하는 계수조정 소위에서는 각자의 지역구에 예산을 더 배정하기 위한 힘겨루기가 더욱 치열하다.

국회는 심의과정에서 정부 예산안을 조정할 수 있다. 증액 때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된다. 그런만큼 올해 수정예산안이 제출된 것은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수정예산안이 제출된 적은 3선 개헌, 신군부 등장 등 정치적 요인으로 국회가 파행됐던 두 번밖에 없었다. 국회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10조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정한다는 의미도 있고, 정부가 경기회복을 위해 애쓴다는 상징적 효과도 노렸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 이례적으로 수정예산안을 제출하면서 10조원을 긴급 증액한 이유는 무엇일까. 강만수 장관은 예결위에서 “세계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아 재정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전례 없는 재정확대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나라 돈을 풀어 경기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산 증액분 10조원 중 8조원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등 경기부양에 책정됐다. 세금도 감면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도 세금을 감면하고 재정을 확대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대공황 때의 ‘뉴딜 정책’이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세금은 적게 걷으면서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은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해친다는 게 문제다. 월급은 줄었는데 생활비를 더 쓰면 가계부에 구멍이 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 하지만 국경복 국회 예결위 수석전문위원은 “선진국에 비해 사회복지 수준과 연금 성숙도가 낮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재정지출은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하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방향과도 맞아떨어진다. 예산안에는 정부의 지향점이 드러난다. 각 가정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비·식비·문화비 등의 규모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노무현 정부는 복지 분야의 예산 비중을 크게 높였다. 국회 예산안 심사 때도 경제성장이냐 복지 증대냐를 놓고 가치관의 대립이 일어난다.

지금도 민주당은 ‘부자 감세’에 반대하고 ‘서민 예산’을 증액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도 복지 예산이 줄지는 않았다. 복지 제도는 일단 한번 마련되고 나면 자연적으로 예산이 증가한다. 매년 수혜자가 늘기 때문이다.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들이 노무현 정부 말기에 도입됐기 때문에 앞으로도 정부의 성격과 관계없이 복지 분야 예산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예산안 심사에 ‘정치’가 개입되기도 한다. 최근 야당은 공정택 서울시교육감 청문회 여부를 문제 삼아 상임위(교과위) 예비심사를 거부했다. 예결위는 심의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 총리의 고가 호텔 숙박 논쟁에 시간을 보냈다. 이렇듯 여야의 정책 방향 대립, 정치 공방과 지역 이권 다툼에 얼룩지다 보니 예산 심사는 매년 법정 기한(12월 2일)을 넘기기 일쑤다.

올해도 예산액을 본격 조정하는 소위원회가 12월 1일에서야 처음 열릴 예정이니 법정 기한을 넘기는 건 기정사실이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예산 심사가 늦어지면 정부가 조급해진다. 그런 점을 이용해 최대한 심사를 늦췄다가 다른 정치적 사안과 묶어 ‘딜’을 하는 게 고질적 병폐”라고 지적했다.

예산안을 꼼꼼히 심사해도 업무추진비(판공비) 등 정해진 예산 내에서 임의로 쓸 수 있는 비용까지 챙기기는 쉽지 않다. 집안 살림 계획을 짤 때도 세세한 항목을 밝히지 않고 외식비·피복비 하는 식으로 큰 덩어리만 정해 놓으면 술값 등으로 써 버릴 위험이 크다. 나라 살림은 집안 살림과 마찬가지다. 가계부를 꼼꼼히 들여다보듯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잘 살피면 새는 구멍을 막을 수 있다. ‘신 뉴딜 정책’ 시대에 더욱 필요한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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