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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일 만에 끝난 4인방 재판 … 마오쩌둥의 착오 인정 계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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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34면

1980년 11월 특별법정에 선 피고인들. 왼쪽부터 장춘차오·천보다·왕훙원·야오원위안·장칭·황융셩·우파셴·리쭤펑.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27일 만인 1976년 10월 6일 화궈펑(華國鋒)·예젠잉(葉劍英)·왕둥싱(王東興) 등은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을 교묘한 방법으로 유인해 체포했다. 장칭(江靑)도 마찬가지였다. 10년간 전 중국을 광란에 휩싸이게 했던 4인방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이들은 이듬해 7월 초 당적과 모든 직책을 박탈당한 채 감옥으로 이송될 때까지 6개월 동안 외부와 격리된 상태에서 심사를 받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8>

체포 4년 만인 80년 11월 20일 오후 3시 공안부 강당에 마련된 ‘최고인민법원특별법정’에서 린뱌오(林彪)·장칭 반혁명집단(反革命集團)에 대한 공개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은 모두 10명이었다. 린뱌오 부부와 아들은 사망한 후였다. 재판장은 마오쩌둥이 사망 1년 전 최고인민법원장에 임명한 마오의 징강산(井岡山) 시절 수행비서 출신이었다.

재판장의 호명에 의해 전(前) 당 부주석 왕훙원이 제일 먼저 입장했다. 빈곤한 가정에 태어나 부잣집 농사일 거들며 돼지 키우다 보니 교육이라곤 3개월 동안 사숙 문턱 드나든 게 전부였다. 자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휴전 후에는 부대를 따라 강남을 전전했다. 상하이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조반파 수령으로 상하이를 장악해 하루아침에 정치국 상임위원에 진입한 마오의 후계자였다.

재판기간 동안 가장 비굴해 벼락출세한 사람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다음은 붓 하나로 뭇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희대의 문필가 야오원위안이었다.

금붕어처럼 생긴 눈알을 굴리며 입장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반혁명 분자로 취급되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서 장텅자오(江騰蛟)·추후이쭤(邱會作)·우파셴(吳法憲)·황융셩(黃永勝)·천보다(陳伯達)·리쭤펑(李作鵬)·장춘차오가 입장했다. 이론가였던 천보다와 장춘차오를 제외한 5명은 어린 시절 홍군에 투신해 수많은 전공을 세운 역전의 장군이며 건국의 공신들이었다. “군대의 권력은 너희들에게 있다. 절대로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린뱌오의 말에 홀린 결과였다. 공군사령관이었던 우파셴은 “나는 린뱌오 부부의 개(狗)였다. 내가 범죄자가 된 것은 야심 때문이었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특별군사법정에서 따로 재판을 받았다.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부총리였던 장춘차오는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고, 문혁 초기 서열 4위였던 이론가 천보다는 부축을 받으며 입장했다.

장칭은 제일 마지막에 입장했다. 23세에 옌안에서 마오를 만나 35세에 중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던 장칭이 무산계급의 위대한 기수에서 죄수로 전락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 흑발을 단정히 빗은 싸늘한 모습이었다. 평소 마오로부터 “능력도 없는 게 눈만 높다” “재주도 없으면서 뜻만 크다”는 핀잔을 받았지만 건국 이후 베이징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책을 빌려본 장본인이기도 했다.

다음해 1월 25일까지 77일간 계속된 재판은 마오쩌둥이 만년에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마오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화궈펑의 주석 지위도 이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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