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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자금 늘 스스로 마련 … 장제스가 보낸 뭉칫돈도 거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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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34면

1953년 2월 헌법기초위원 시절 베이징에서 마오와 환담하는 허샹닝. 김명호 제공

1925년 8월 20일 허샹닝은 랴오중카이와 함께 국민당 중앙집행위 회의에 참석했다. 중앙당부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5발의 총성이 울렸다. 랴오중카이는 “국가와 당을 위해서라면 누가 무슨 반대를 하건 두렵지 않았다. 나를 때리고 죽인다 해도 내 몸이 아깝지 않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랴오중카이의 장례는 차이어(蔡鍔)와 쑨원에 이어 세 번째 국장(國葬)이었다. 허샹닝은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우리 가족 모두의 목숨을 앗아가도 상관치 않겠다”며 랴오중카이의 영혼과 애통해하는 동지들을 위로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7> 혁명시대 부녀운동의 영수<下>

홀몸이 된 허샹닝은 쑨원뿐만 아니라 망부의 유지까지 받들어야 했다. 이듬해 열린 제2차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쑹칭링(宋慶齡)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된 후 각계에 부녀연합회를 조직했고 부녀해방운동을 추진했다. 장제스(蔣介石)의 북벌을 지지하는 기고문을 통해 부녀자들도 집안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혁명에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했지만 장제스의 개인 독재가 우려되자 장의 중앙상임위 주석과 군사위 주석직 박탈에 앞장섰다.

장제스도 허샹닝에게만은 하느라고 했다. 정변에 성공한 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성을 다했고, 거절당하긴 했지만 쑹메이링과 결혼할 때도 결혼보증인이 돼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두 집안은 원래 친분이 두터웠다. 장이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 랴오중카이는 당서기였다. 한 울타리에 살았고 애들끼리도 서로 친했다. 장징궈(蔣經國)가 랴오청즈(廖承志)보다 두 살 어렸다. 그러나 허샹닝의 눈에 비친 장제스는 쑨원과 랴오중카이의 3대 정책인 ‘연아(聯俄), 연공(聯共), 부조공농(扶助工農)’을 파괴한 혁명의 배신자였다. 정부가 제의한 모든 요직을 거절했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직도 스스로 던져 버렸다. 그 어떤 정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림과 시로 소일하던 허샹닝은 랴오중카이의 생전 소망이었던 농공업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출국을 결심했다.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 교외에 거처를 정한 후 중국인 유학생들을 돌보며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아들 랴오청즈는 함부르크에 있던 국제해운노조 집행위원과 세계부두노조 서기를 거쳐 네덜란드에서 중화전국노조 유럽지부를 설립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독일에서 모자가 상봉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동북을 점령하자 허샹닝은 유럽 생활을 정리했다. 귀국하자마자 서화전을 열어 돈을 만들었다. 쑹칭링과 함께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국난구호대를 조직해 동북의 항일운동을 현지에 가서 지원했다. 항일전쟁 기간 각지를 유랑해 생활은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닭을 키우고 채소를 재배해 의식을 해결하며 항일 선전활동을 했다. 장제스가 인편에 100만 위안을 보냈지만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리는 생활, 돈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쉽다”는 글과 함께 돌려보냈다.

허샹닝은 요즘의 일부 시민단체들처럼 사회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원금이나 후원금을 구걸하러 다닌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뛰어난 서화가였던 그는 직접 그림을 그려 판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고 부녀운동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했다. 혁명가이기 이전에 고귀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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